Friday, February 13, 2015

DEC. 21. 14. 주일강단 : 대강절 ADVENT SERIES 4 영광과 평화의 왕 그리스도


KM과 EM이 함께하는 대강절 ADVENT 시리즈 4








영광과 평화의 왕 그리스도

2:120

 

 

 

 

 

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각납니다. 부족한 종이 자란 작은 교회는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성탄절 이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새벽송을 돌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과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면 우리 성도님들이 대문을 열고 나와 함께 찬송을 부르고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 고 삶은 계란도 나누어 주고 준비한 선물을 줍니다. 각 지역으로 새벽송을 돌던 무리가 아침에 다 교회로 돌아오면 몇자루의 큰 선물 보따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성탄절 낮에 우리 동네에 있는 고아원을 방문하여 전달하곤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런 새벽송의 추억과 더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성탄 연극입니다.     

 

교회에서 성극을 준비하여 공연하면서 많은 은혜를 주고 받았습니다. 심지어 에바 성극단 이란 부서를 만들어 부활절과 성탄절에 가을 문학의 밤에 전도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연극이 매력적인 것은 생생한 호흡이 느껴지는 라이브와 실수했을 때에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솔직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극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나타나면 조연을 다 사라 집니다. 조연은 오직 주인공을 위해 자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더욱 빛나게 하고 주인공을 통해 무엇인가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라는 무대에 수많은 조연들이 등장하였지만 진정한 주인 공이 오시니 그들은 다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신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주인공이 오자 사방에서 조명을 비추며 그의 탄생과 자람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까지 다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입니다. 그 중 누가가 오늘 말씀을 통해 주인공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가 소개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이십니다. 그러면 누가가 비추는 무대의 이 왕은 어떤 왕이십니까?

1. 가장 겸손한 왕이시다

 

7절에 보세요.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어서 12절을 보세요.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말 구유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그것도 짐승의 구유에서 태어 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이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 에게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은 세메이온이란 말로 지시하다”,“암시하다이런 의미입니다. 곧 이 구유에 뉘인 아기가 바로 사인인데 무슨 사인이예요?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왕국을 세울 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오늘 첫아들(7)이라고 하셨는데 그 첫아들을 낳게 되면 그가 세자가 될 것이고 다음 왕이 될 것인데 그를 짐승의 구유에 뉘일 왕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고급 왕궁 의 침대에서 어의들과 온갖 신하와 시녀들이 시중을 드는 가운데 태어나게 할 것이 아닙 니까? 그런데 하늘의 하늘들의 하늘도 감당할 수 없는 우주 만물보다 크신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셨는데 말구유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표적으로 말씀하시 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낮고 낮은 인간이 되시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신 왕이신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하실 때도 보세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지요. 세상의 왕들은 어떠합니까? 예루 살렘에 입성할 때 어느 세상의 왕이 나귀를 타고 입성 합니까?  

 

로마의 황제들이 입성하는 것을 보면 가장 좋고 튼튼한 백말을 타고 장엄한 나팔소리와 온 세상 백성의 환호성 속에 입성 하잖아요.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것은 세상왕들과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중에서도 새끼의 등을 빌려 타고 입성하십니다. 세상의 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겸손한 왕이신 것입니다.

 

최근에 50여년 목회 사역을 마치시고 은퇴하신 목사님과 깊은 교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지난 50년동안 아무도 모르게 개인적으로 해외에 13개의 교회를 개척하신 분입 니다. 깊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간증 중에 자신의 목회에 결정적인 위기가 세 번 있었는데 그 위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로 이어졌고 그 회개의 첫번째는 교만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교만해졌을때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내리치 셨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종에게 더욱 겸손하게 끝까지 목회할 것을 권면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교만한 이 종도 더욱 겸손해 지길 소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잠언 말씀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가 있다고 하셨어요.(6:16)

 

곧 교만한 과 거짓된 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 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들인데 바로 첫째가 교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교만을 이토록 싫어하실까요? 겸손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정반대 꼭지점에 있는 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마음이요, 아담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가 겸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말구유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요 감격이요 감사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겸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말구유에 뉘인 아기가 주는 표적의 메시지입니다.

  

2. 가장 기쁜 소식의 왕이시다

 

10절을 보세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 에게 전하노라

 

오늘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목자들이 들에서 자기 양떼를 지킬 때에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의 비추임을 받으면 무섭고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습니다. 물리적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초월적인 역사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 님은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무엇을 주십니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여전히 세상에서는 온갖 뉴스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직 예수님이 오셨다는 뉴스입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곤고해도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 엘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뉴스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심지어 죽음이 우리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뉴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 분이 바로 가장 큰 기쁨의 굿 뉴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브리엘이 인류에게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였듯이 우리도 이 굿 뉴스 를 전해야만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하여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 우리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온갖 뉴스는 전하면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를 주저한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영광 중에 영광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여러분! 지금 이 기쁨의 소식을 누가 누구에게 전합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목자 들에게 전합니다. 목자들은 지금으로 말씀드리면 지극히 평범한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예수님의 대한 소식을 듣자 가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소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곧 사명자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뵙고 그 곳에 있는 자들에게 이 아기가 바로 그리스도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제대로 만난 사람은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이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은 그 다음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제대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파를 통해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온 백성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의 왕이시다

 

13,14절을 보세요.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목자들이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천군과 천사 들이 무엇이라 노래했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시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곧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이 어떻게 영광이 됩니까?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세요. 그것이 영광입니까? 아니예요.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면 절대 영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추구한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아담이 추구한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자리에 앉으 려고 했던 것입니다. 곧 그릇된 올라감의 영광이요, 자기 위치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까지 빼앗으려는 욕심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타락이요 추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영광은 정반대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죽이려 내려가는 영광이요, 자기를 비어 인간이 되고, 종의 마음으로 십자가 죽으시러 오시는 버림의 영광인 것입니다.   

 

바로 이 영광을 아기가 되어 오셔서 실행하여 탄생하시므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천군 천사가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광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사탄과 아담이 추구하는 그릇된 영광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더 낮은 곳으로, 더욱 아래로 내려가세요. 바로 거기에 감당할 수 없는 하나 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낮은 곳에 바로 지극히 높은 곳과 맞닿아 있는 역설의 통로입 니다.

 

로마서 15 7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받아 주셨나요?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받아 주셨나요? 아기로 까지 오셔서, 말 구유에까지 오셔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아마 말없이 받아 주신 것입니다. 누가요? 하나님께서요. 왜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성탄은 주님의 지독한 짝사랑입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철없는 우리, 온통 제 고집대로, 제 욕심대로 사는 우리, 심지어 세상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신 주님께서 그렇게 죽으러, 살리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이야 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우주가 이해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4. 감당할 수 없는 평화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이 감당할 수 없는 나 버림의 영광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14절 하반절을 보세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우리에게 평화로 온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평화로 옵니까? 누구에게 평화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평화를 이루십니다. 본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대적관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 죄 가운데 살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룰수 없게 되었는데 그 특징이 바로 고통이요, 불화요, 다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시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라 다툼과 전쟁 과 그에 따른 고통이 넘칩니다. 삶 자체가 치열한 생존경쟁과 같아서 그 얽매인 관계 속에 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용서하게 하고, 용납하게 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만들어 가십 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진정한 평화는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었고,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다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평화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다시는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 니다.(4:3)

 

여러분! 예수님이 사탄의 세력을, 이 세상을 무엇으로 이기십니까? 무기와 무력으로 이기십 니까? 그러면 얼마든지 열두영이나 되는 천사에게 명하여 로마를 제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온전히 십자가에 자신이 죽으심으로 사랑과 평화로 이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들어 말고의 귀를 내리쳤을 때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26:25) 여러분! 우리가 작은 일에도 칼을 뽑고, 창을 뽑아 던지려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 나 예수님은 우리의 칼과 창을 내려 놓게 하시는 분입니다.

 

곧 예수님은 진정으로 칼을 칼집에 꽂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2세기경의 역사가 저스틴은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저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모두 전쟁과 살인, 온갖 악한 일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된 세상의 모든 성도들은 이제 전쟁의 무기를 내려 놓았습니다. 칼을 쟁기로 창을 농기구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정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를 경작합니다.”저스틴(Justin Martyr:AD100~165),‘트리포와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110

 

사랑하는 여러분!

19절을 보세요.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예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삶에서 일어난 이 감당할 수 없는 역사를 마리아는 마음에 깊이 담고 일평생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섬긴 것입니다.

 

오늘 이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여러분의 마음 깊이 새기고 생각하고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이 영광과 평화의 구주를 온전히 만나고 그 분과 동행하는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을 통해 더 넓은 이웃들에게 흘러 넘치길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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