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17, 2014

JULY. 13. 14. 말씀으로 사는 교회 주일강단 :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단3:1∼12)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3:112-
 

신앙생활은 영적인 치열한 싸움의 현장입니다. 사탄의 관심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사탄의 관심은 성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심 또한 성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심령과 삶이 영적 전투의 최전선입니다.

바울은 내 안에 죄성과 성령이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는 사자에게 삼키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과 미국교회에서 유수한 목회자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회가 매너리즘에 빠질 때, 어느새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기념비를 세우기에 여념이 없을 때 영적 빨간불이 들어 옵니다.

목회자도 이런데 성도는 어떻겠습니까? 내 영적 신호등의 색깔은 무엇입니까? 파란불입니까? 은혜의 강물이 계속 흐르게 하십시오! 노란불입니까? 그러면 서야 합니다. 서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빨간불이 들어 왔다면 만사 제쳐 놓고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파란불이 들어 올 때까지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늘 영적 신호등의 색을 살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날마다 깨어서 치열한 영적 싸움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날마다 파란불의 신앙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순교적 삶을 살므로 가능합니다.

순교적 삶은 어느 비상한 시대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평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순교적 삶 만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러한 평상시 순교적 삶을 살 때에만 진정 피 흘리는 순간이 올 때도 기꺼이 죽음보다 강한 신앙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브갓네살은 바벨론 두라 평지에 약 높이 90feet(27m)와 넓이 9feet(2.7m) 의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이 사건은 다니엘서에서 세번째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메시지를 통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위기의 때에 빛을 발하라!

2장에서 다니엘이 왕이 꾼 꿈과 해석을 한 후에 느브갓네살은 다니엘을 왕궁에서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천거로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각 지방의 도지사들이 되었습니다. 120도 중에서 한 도씩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도지사로 있을 때 또 위기가 찾아 온 것입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위기를 믿음으로 승리했는데 또 다른 위기가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1-3장까지 세 번의 위기와 세 번의 승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를 거부한 사건이고, 두번째는 느브갓네살의 큰 우상꿈과 해석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오늘 사건은 자신의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을 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민족을 보세요. 일제시대가 지나니 6 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났더니 독재 권력이 짓밟았습니다. 이제 좀 살만해 졌다고 하니 부정과 부패가 나라를 세월호처럼 침몰시키려 합니다. 위기의 연속입니다. 우리 조국 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과 믿음의 정신으로 세워진 이 나라가 만연된 세속화와 타락으로 교회마저도 자유주의 사상에 배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위기는 계속 찾아 옵니다. 우리 삶 속에는 평안만 있기를 바라지만 위기도 찾아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평안하다 하여 위기의식을 잊고 나태해지면 진짜 위기가 왔을 때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훈련으로 무장되지 않은 군인은 진짜 전쟁이 일어나면 다 도망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시에 사람을 보고 짖지 않는 개가 어떻게 도둑이 왔다고 짖겠습니까? 그러므로 순교적 신앙은 평상시의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서는 왜 이처럼 반복적으로 위기 사건을 다룹니까?

그것은 먼저 성도도 얼마든지 위기를 당할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고, 다음은 위기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앞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장된 축복이 됨을 보이시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위기를 통해 아니 위기를 믿음으로 직면하는 소수의 자기 백성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 그 뜻을 그 시대에 계시 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바벨론의 왕보다 크심을 계시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실 예수의 나라가 올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나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그 뜻을 나타낼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관념적, 추상적 신으로 욕되게 하는가? 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 길에 아무 일도 없고 그저 평안하시기 만을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모두 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위기의 때에 오히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 드러나시게 해야만 합니다! 위기를 무서워하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발할 기회로 삼는 삶이 되십시오! 나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 역사하시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영광스런  삶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아 위기의 때에 찬란히 빛을 발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NO 할 줄 아는 성도가 되라!

이 세 번의 위기와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NO 할 줄 아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는 얼마든지 용납하고 양보하고 종노릇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보드라인(경계선)에서는 반드시 NO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경계선에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기독교 진리를 허물고 들어 오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비진리와 타협하여 인본주의로 전락한 자들이 무수합니다. 예수의 보혈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진리가 신학교와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비진리의 주장들에 대해 분명히 NO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그 왕의 권력과 우상 앞에 다수가 무릎을 꿇습니다.

총독, 수령, 행정관, 모사, 재무관, 재판관, 법률사, 각 지방 모든 관원(2,3) 그리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7)이 나팔과 온갖 악기가 울려 퍼질 때 모두 다 절하고 있습니다. 내 옆에서 모두 엎드리고 있는데 나만 꼿꼿이 서 있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이 엎드린 가운데 오직 세 사람 만이 아무 요동함 없이 서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평상시에는 세 사람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문제만 건드리면 세 사람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드러나고 싶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물고기와 같아서 썩어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와 다른 것입니다. 물결이 흘러 내려갈 때 그들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살아 있기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조용합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나 평상시에 그들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세상이 거꾸로 갑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은 여전히 자기의 믿음으로, 당연한 신앙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이 그 시대에 사람들 가운데 특별해 지는 것입니다. 도드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수가 비진리로 흘러갈 때, 심지어 교회가 배교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 평상시 대로 믿는데 그것이 NO가 되어질 수 밖에 없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고 서 있을 때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요? 권력의 칼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을 가장 자랑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렇고 손양원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이 분들이 서슬퍼런 시대에 NO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제대로 된 신앙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성도의 길인 것입니다

평상시에, 평안할 때 사탄 마귀의 공격에 대해 NO하고 외치는 성도가 되십시오. 비진리와 거짓 진리에 대해 NO라고 선포하십시오. 세상과 우상이 주는 유혹에 거절할 것을 마땅히 거절하는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  

아마 두라 평지에서 우상 앞에 절한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이 순간 만을 넘기자며 절한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리라 결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신사 참배에 참여 한 것을 아무도 몰랐는데 템플턴 상을 받을 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얼마든지 각 지방의 도지사로 있으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을 위해 귀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합리화하여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바로 이 시간, 현재의 상태 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이랬는데하고 추억 거리가 되어선 안됩니다. ‘미래에는 이렇게 할 것이야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과 여러분 한 분 한 분과의 삶이요 관계입니다. 신앙은 과거도 중요하고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과거를 말해주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 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절을 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도지사라는 과거와 미래의 자리보다도 우상 숭배를 할 수 없다는 현재의 성도의 자리가 더욱 중하고 귀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자리와 성도의 자리 곧 세상의 유익과 성도의 양심이 날카로운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만날 때 성도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그 자리를 지키는 자 그를 보고 예수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으며, 이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연약한 자가 세상의 유익과 자리에 연연하여 성도의 자리를 버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붉은 수프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먹은 에서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인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를 핏값으로 주고 사신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의 자리가 무슨 자리인 줄 아십니까? 과연 그것이 세상의 도지사 자리만 못한 자리입니까?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자리는 하나님 곁에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는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2:6) 과연 어떤 세상의 자리로 하나님 곁에 앉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세상의 유익 때문에 성도의 귀한 자리를 버리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런 성도의 자리를 위해 세상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 니다


4. 목숨 걸고 믿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신상 앞에서 절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곧 생명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 정도가 아니라 풀무불에 던져 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들을 아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합 니까?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3:16b)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미 목숨을 내 놓은 것입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생명에 연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상시에 당연한 것이 그 순간에는 생명을 건 순교적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평상시나 위기때나 동일한 신앙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왜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여 세상에 드러내십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은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적 신앙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생명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생명을 던져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귀한 생명을 던지시고 저와 여러분을 살리셨으니 우리도 생명 걸고 예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인 한 감독이 19년만에 시선’ 이란 영화를 개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 고스란히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뀐 자신의 시선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시선’ 이라 지었습니다. 그 영화는 한 교회의 단기 선교팀이 모슬렘 지역에 선교를 갖다가 반군들에 의해 납치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알라를 믿으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생사의 갈림 길에서 겪는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9명의 선교팀이 죽음 앞에서 겪는 갈등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인 공은 가짜 선교사였는데 진짜가 되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자신은 순교하는 감동으로 영화는 마칩니다. 감독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다시 해석하여 세상에 내 놓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는 자기의 영화는 기존과 다른 시선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왜 우리는 이 자리,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까지 나의 소원을 빌고, 나의 작은 유익을 위해서 성도의 자리를 버리는 신앙이었다면 이 시간 부터는  세상의 자리와 성도의 자리에서 당연히 성도의 자리를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성도의 당연한 자리가 순교적 자리로 변화 될 때 우리는 어떤 사탄의 역사도, 어떤 위기도 물리치는 이 시대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저와 여러분,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Friday, July 11, 2014

JULY. 6. 14. LWC 주일강단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행13:17∼2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13:1723-




인생을 살다보면 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한 사람이 일평생 만나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이 약 일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그런데 그 일만명 가운데 과연 진정으로 마음이 맞고, 생각이 같아 깊은 영혼의 내면까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인생의 만남이 피상적 관계에서 머물다가 끝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마음이 맞고 함께 깊은 영혼의 대화까지 가능한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그러한 관계로 나아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더 이상 스치는 목회가 아니요 깊은 교제와 교통, 깊은 아픔과 기쁨의 공감의 목양을 하기 원합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이러할진대 만약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마음과 맞고, 하나님과 깊은 영혼 의 교제를 하며 산다면 그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하나님과 그런 만남 의 삶을 살았을까요?

오늘 하나님은 놀랍게도 내가 이새의 아들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13:2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맞았다’, ‘합했다라는 말은 카타라는 전치사인데 하나님 마음에∼가까이에’,‘하나님 마음을∼따르는그런 의미입니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까이에서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윗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해 내셨는데 사십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또 그 후 사백오십년 동안 약속대로 그들 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사사까지 보내주셨는데 왕을 구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그 은혜를 받는 자들이 하나님 마음에 별로 들지 않은 것입 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철저히 자기 중심적으로 섬긴 것입니다. 특히 사울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런 배경을 지금 성경이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 새의 아들 다윗을 만났는데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 다윗 외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그것을 숫자로도 알 수 있어요. 아브라 함 236 야곱 365 이사야 60 베드로 168 요한 156 바울 192 모세 812 다윗 903 이 숫자가 무엇인지 아세요? 성경이 기록된 이름의 횟수입니다.


이 숫자의 크기가 하나님의 사랑의 지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사람 가운데서도 다윗의 이름을 903번나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윗을 생각 하고 계신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과 북의 이스라엘 왕 39명을 오직 다윗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자신의 마음과 가장 가까웠던 다윗을 통해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삶입니까그러면 다윗의 어떠한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맞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따르는 것이었을까요? 오늘 이것을 살펴봄으로 저와 여러분도 이 시대에 하나님 마음에 맞아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외모보다 중심을 아름답게 하라

다윗에 대한 성경의 첫번째 기록은 그는 외모보다는 중심 곧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가서 그 아들들 가운데서 왕을 삼아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엘리압, 곧 맏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마음 속으로 과연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 면서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선지자도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지 몰라요. 그 사람의 스펙을 보고, 연봉을 보며, 소유를 봅니다. 그리고 '과연 이 사람이다'라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의 외모와 중심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이라는 말은 레브란 말인데 속사람(inner man),마음,영혼,의지’ 이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도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값진 사람은 외모가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숨은 속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비록 막내이고 들판에서 아버지의 몇 마리 양을 지키는 목동에 불과해 아버지도 그 누구도 염두해 두지 않은 잊혀진 아들이었지만 하나님 만은 다윗을 아셨고 그의 중심과 마음의 아름다움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고 바로 이가 그니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속사람이 아름다운 여러분 한 분 한 분 다 되어 주님께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2. 사람보다 하나님을 상대하라 

두번째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께 맞은 것 중에 하나가 다윗은 언제나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사울과 다윗의 세 형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들이 모두 골리앗 앞에서 40주야를 벌벌 떨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안보이고 거인 골리앗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삼상17:37,45)

그들은 골리앗 앞에서는 홍해와 요단을 건너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도 잊어버렸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하나님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40일을 꼼짝 못하고 감히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골리앗만 상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달랐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앞에 엄연히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15살 정도의 소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형들 그리고 군사들과는 전혀 다른 용기와 담대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골리앗보다는 하나님을 상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어려워 문제가 생기면 그 상황만을 상대하고, 그 문제만을 묵상하며 점점 용기를 잃습니다. 그 결과 두려움과 좌절의 그림자가 마음을 덮고 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마치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주님을 잊어 버리고 물결만 바라보다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황도 정확히 인식할 뿐 아니라 그 상황의 주인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상대하고자 했습니다. 그 앞에는 골리앗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욱 크게 계셨습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계신 진정한 거인인 대장 예수를 본 것입니다.

사울이 약 15년동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도 다윗은 사울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를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오히려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오직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상대합니다. 그러면서 사울에게 하는 말이 왜 이스라엘의 왕이 죽은 개와 같은 나를 쫓아오시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왕과 나 사이를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토록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과 오직 하나님께 그 상황을 올려드리는 다윗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누구를 더 사랑하실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사람이 힘들게 해도 오직 하나님만 상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입니까? 속으십시오. 누가 오해를 합니까? 오해를 받으세요. 누가 욕을 합니까? 욕을 들으세요. 그러나 꼭 잊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 저 분과 나 사이를 다 아시는 주님, 판단하옵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크고 작은 일에서 사람과 상황을 상대하지 말고, 그 현실은 냉정하게 인식하되 오직 그 상황과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세요. 그것이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고 상대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선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처럼 하나님만 상대하는 자가 받는 은혜입니다.   


  3.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라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 것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정직입니다.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17:1)고 요구하셨습니다. 모세를 통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너는 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18:1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이라는 단어가 동일한 타밈이란 말인데 쉽게 말씀드리면흠이 없어라란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타락한 죄인인데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완전하여 흠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완전하라고 요구하고 계세요.

더욱 놀라운 것은 다윗이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하22 24절에 보면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 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또 그의 앞에서 완전하여 할 때 완전이 동일한 타밈이란 단어입니다.

문맥을 보면 다윗이 자신이 아무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단지 어떤 사건, 곧 하나님과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곧 죄악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 죄악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지킴으로 승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여기 완전타밈의 뜻 가운데 성실’,‘정직’,‘진실’ (integrity) 이런 의미가 있어요.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절대 완전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에 너희들이 내 앞에서, 죄악에 미혹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말씀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싸우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타밈의 의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삶, 자기 속과 삶 가운데 타밈을 이루고자 하는 자세가 하나님 마음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도 그의 인생 가운데 크게 실패하여 큰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그가 타밈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단이 와서 죄를 지적할 때 그는 하나님 앞과 말씀 앞에서 즉각 회개하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자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에게 자신의 완전함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4.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

다윗의 인생 가운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하나가 되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사건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 이후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낡은 장막아래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좀 달라야 합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아세요. 삼하7:1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싸우시고 승리케 하셔서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궁에서 평안함 가운데 살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승리와 평안의 삶을 주신 것입 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윗에 대한 마음이요, 사랑이요, 배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은 다윗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만 할 때가 얼마나 많읍니까?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선지자 나단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보세요.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하시고,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 에게 왕권과 왕궁을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지어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곧 하나님과 다윗이 서로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가려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왕상 8:18)라고 하세요. 그러면서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그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다윗과 그 언약의 백성을 위해 영원한 영광의 집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 집을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수많은 세월동안 굴 속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체험하고 또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굴 속을 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보좌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날마다 찬양의 기도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굴 속에 임재하셔서 천국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만민 중에서, 열방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노래하고 선포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이처럼 마음이 맞는 다윗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시는 자신의 뜻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13:36)라고 한 줄로 그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 우리 시대에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 주 앞에 서는 영광의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Wednesday, July 2, 2014

JUN. 29. 14 LWC 주일강단 :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하라 (히4:1∼13)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하라

4:113
 
지난 주에 우리는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노출시키는 삶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말씀에 온전히 노출될 때에만 우리 심령 안에서 영적 광합성이 활발하게 일어나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한 단계 더 들어가기 원합니다.

며칠 전 해외에 나가 섬기고 있는 선교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영어 수학 캠프로 그 곳 학생들을 섬기고,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 면서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직접 농사도 짓고 있는데 하시는 말씀이 돌을 걷어내고, 땅을 뒤집어 엎어주면 물이 40cm 까지 내려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4cm 밖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기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였습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젹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10,11)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태양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비와 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태양과 비와 눈에 비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태양과 비와 눈은 날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을 살리고 자라게 하며 양식을 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자연의 원리인데 그 것처럼 영적 세계에도 반드시 그러한 원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해와 비와 눈과 같아서 그 말씀으로 인해 우리 심령이 날마다 살아나고, 자라며, 변화되어, 기쁨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개인과 교회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역사하는 성도와 교회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들을 경험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넘치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삶 가운데 이처럼 말씀이 비와 눈처럼 살아 역사하는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증거하기 원합니다


1. 말씀이 유익하게 하라

2절 상반절을 보세요.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익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출애굽한 세대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대는 사실 가장 축복을 받은 세대 였습니다. 430년 애굽의 종살이를 벗어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출애굽한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을 얻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약속을 이미 받았지만 그 약속이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그 과거 사건을 말하면서 너희 중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안식의 약속을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말씀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아무리 태양이 빛을 비추어도 숨어 있으면 그 빛이 그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비와 눈이 아무리 내려도 땅이 그것을 흡수하지 않고 흘려 보내면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 말씀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말씀은 내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10, 20년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데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귓전에 좋은 말로 듣고 흘려 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꼭 유익이 되는 역사가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믿음과 결부시키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자에게 유익이 됩니까? 여기서 유익이 된다는 의미는 단순한 이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의하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 다시 말씀드리면 사느냐? 죽느냐? 의 문제입니다. 곧 말씀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느냐? 영원히 죽이느냐의 생명이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생명의 말씀을 영원한 유익이 되게 할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2절 하반절 말씀을 보세요.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되는 원리는 그 말씀을 듣는 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진리요, 영이요, 생명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은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듣는자 안에서 살아 역사 하려면 바로 듣는 자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듣는 자가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말씀은 그냥 흘려 내려가는 빗물처럼 그에게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듣는 자가 마음을 고쳐 먹고, 소위 자기 마음의 밭을 기경하여 옥토로 준비하면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듣는 자가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결부시킨다는 말은 <슁케란뉘미>란 말인데‘섞다,혼합하다,묶어지다,일치하다’이런 의미입니다.

곧 말씀이 들려질 때 믿음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은 말씀을 내 심령과 삶과 묶어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의 육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어진다 할지라도 듣는 자가 믿음으로 일치시키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들려질 때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흡수하고, 마음과 삶으로 묶어 하나가 되면 이제 그 심령과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 말씀으로 쪼개져라

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킬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동한다고 하십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곧 우리 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서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든 우리 영혼을 소성시키고, 살리며, 생각과 사상을 변화시키며, 믿음이 자라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수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과 같다 고 했습니까?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로 에베소서 에서는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곧 성령의 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과 성령을 나누지 마십시오.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성령의 검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성령의 검 곧 말씀 이 살아 역사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우리의 영과 혼을 수술해서 살리고, 우리의 가장 깊은 심령 속의 모든 것들을 쪼개어 타락한 것들을 거두어 내심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치유해 가시는 것입니다또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타락한 마음과 생각과 정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시키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예리한 검이 되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전 영역을 수술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인간 전존재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곧 영, , 관절, 골수, 마음의 생각과 뜻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로 인해 타락하여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진정한 안식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성령의 검으로 우리를 수술하시므로 자기 백성을 살리십니다. 그것이 곧 말씀의 살아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이 성령의 검인 말씀의 수술을 받아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자만이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도 이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쪼개려 해서는 안됩니다. 얼마나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맘대로, 이성의 잣대로 쪼개어 인본주의 사상과 혼합시키고 혼잡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철저히 말씀에 의해 우리 인간이 쪼개져야만 합니다. 수술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 만이 내 영혼이 살고, 삶이 살고, 영생을 얻는 생명 회복의 은혜인 것입니다.


4. 순종의 본이 되라

1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출애굽한 광야 세대가 본이 되었는데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복받은 세대였는데 가장 불행한 세대가 된 것입니다. 곧 불순종의 나쁜 본이 된 것입니다. 그 불순종의 나쁜 본이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나타 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그의 말씀도 못 믿습니다.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못하니 말씀으로 쪼개질 수도 없어 옛 사람의 불만과 원망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만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다윗이나 히브리서 저자나 지금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들려질 때, 주님의 음성 이 들려질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퍅하게 굳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요, 영원한 구원을 주는 말씀이요, 생명을 주어 유쾌하게 함께 살고, 함께 가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니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에 의해 쪼개지고 수술받아 변화되고 회복되기는 커녕 하나님을 믿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 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없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이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진리요, 자신의 생각이 옳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아무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하며 믿음으로 결부시키는 사람은 순종하게 됩니다. 곧 믿음은 순종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모세를 보세요. 역사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믿음으로 화합하고, 말씀에 의해 쪼개지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 사람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풍성하게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의 본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나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5. 결산을 준비하라

13절을 보세요.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 진단과 처방과 수술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훗날 말씀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그 앞에서 결산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다시 오실 때 놀랍게도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각 사람을 결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멋대로 나만 위해 살다가 부끄럽고 초라한 벌거벗은 모습으로 결산대 앞에 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믿음으로 결부시켜 성령의 검에 의해 온전히 쪼개어지고 수술받아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 새 믿음, 새 사명으로 살다 결산대 앞에 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속한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말씀의 강력한 역사로 사명자의 삶을 살다 가 주님 앞에 서서 영광의 결산의 상을 받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