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4, 2014

OCT. 19. 14. 주일강단 : EPH SERIES 7 합당하게 삽시다!


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7




합당하게 삽시다!



4:116
 

예전에 30여년전에 미국에 온 한 성도님을 심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어린 소녀시절 가족과 더불어 조국의 한 지방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늘 그의 마음에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 사경회를 열었 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교회를 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설교 가운데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 가 보니 여자 분들도 일을 하더라, 그리 고 빨래를 기계로 하는데 너무 깨끗하고 그 자리에서 다 말리더라. 가장 높은 빌딩이 있는데 그것이 뉴욕에 있더라소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그래 미국으로 가리라! 미국가서 살리라!”그 날부터 이 소녀는 미국 갈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미국에 와서 산지 벌써30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에는 못같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꿈입니다. 비전입니다. 꿈은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도 다 이 소녀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 곳에 오셨지요? 꿈은 이처럼 도전을 가져오고, 도전은 모험을 가져오며, 모험은 성취를 가져옵니다. 귀하고 복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울 입니다. 바울은 오늘도 자신이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 니다.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드림을 꿈꾸며 로마로 몰려 들었 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갖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로마는 시민권에 관대 함으로 이방을 다 자기편으로 삼았습니다. 로마의 꿈을 갖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실패한 사람이요, 별볼일 없는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놀랍게도 이미 태어날 때 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바울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신앙을 변증하는 수단 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곧 팍스 로마나가 선교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이 곳에서 아메리칸 드림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 가야만 합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져 더 넓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킹덤 드림입니다. 아메리칸 드림도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데 킹덤 드림은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바로 이 말씀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부르심은 삶을 변화시킨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르심이란 단어를 1,4절에서 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부르심은 칼레오라는 말인데 부르다, 초청하다, 소집하다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5단계 -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 중에서 세번째 단계입니다.

사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만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 부르심은 부르시기 전의 어느 상태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러면 어디로부터 부르셨다는 것이예요? 죄로 부터입니다. 죄의 상태, 죄의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그 가운데서 절망가운데 살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우리를 불러 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은 또한 미래의 변화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곧 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바울의 말처럼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화의 상태로 완전히 변화시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는 죄의 상태로 부터 변화될 수 없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가져와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삼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만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만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1절에서 무엇이라고 권합니까?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지금 무엇이라고 하시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올 사람은 미국 올 준비하며 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부르 심을 입은 자 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악시오스라는 말인데 그 어원이 무게를 달다란 뜻에서 왔어요. 무게에 맞게”, “가치 있게”, “어울리게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상당한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 그 부르심이 어떠한 상상도 못할 가치인지 말씀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러므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 곧 하나님 옆에 상속자로 앉히실 부르심의 가치에 합당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모든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은 부르심 이전의 삶은 모든 교만, 무절제, 참지 못함, 미움으로 서로 다툼, 분열과 분리 가운데 평안이 없는 삶이 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이제 그에 합당한 가치로 살아야 하는데 모든 겸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모든 겸비함을 말합니다. 온유는 부드럽게 절제하고 자제하는 능력입니다. 오래참음은 사랑가운데 서로 받아 주는데 필수요소입니다. 이 하늘의 가치는 하늘의 줄로 하나로 매여진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평안의 줄입니다. 그 평안의 줄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평안의 줄이 1장에서 우리 곧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가치를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성숙한 화해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이러한 화해의 가치들이 어디서 발견 됩니까?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이제 그 가운데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도 한 소망과 성품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지 7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보세요. 몸 된 지상교회의 하나됨으로 시작하여 하나님 안에서 우주적인 하나됨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대한 부르심에 합당한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 성도의 품성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왕자된 상속자된 지위에 합당한 성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명품 성도입니다. 부르심은 상당한데 여전히 옛사람이 입고 있던 더러운 옷과 가치들을 붙잡고 있으니 변화되지 않고 우리도 모르게 전도의 문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르심의 가치대로 우리의 속사람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15,16절을 보세요.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 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곧 교회를 한 몸으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세요. 어린 아이 들이 태어나서 몸이 자라듯이 몸 된 우리 공동체도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교회는 세상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인데 그 부르심의 목적이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하십니까? 13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다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목적인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새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장 보다는 성숙의 의미가 강해요. 성장은 외형적, 양적 자람이라면 성숙은 내면적, 질적 자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은 외적, 양적 성장이전에 반드시 내적, 질적성숙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하늘의 성전의 일부로 자라가는 것을  지상교회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2:19-22참조)    

그러므로 부르심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 닮기입니다. 속사람부터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성숙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이 완전히 성숙되어진 단계가 바로 구원의 다섯단계 가운데 마지막인 영화롭게 하시는 단계입니다. 이 영화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난 완전한 의의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죄 자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온전히 예수님을 닮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담과 재림 사이에 구원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가 그렇게 변화되어 전혀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시려고 부르신 것이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는 것입니다. 왕자이니 왕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지처럼 죄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답게 모든 겸손과 온유로 왕자답게, 공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성전의 일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선물을 받게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심의 목적대로 우리 곧 교회를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성전과 일치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십니까? 놀랍게도 교회에 선물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7절을 보세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누가 선물을 주신다고 하세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로 잡았던 자를 오히려 사로잡으시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사 하나님께 선물을 받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 만물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충만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곧 이러한 영적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세우셨는데 이들이 바로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 보세요! 세상으로 부터 버림받은 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세우시고, 그 위에 사도와 선지자들을 터로 세우시고,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셔서 어떻 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복음 전하는 자(순회 전도자), 목사와 교사 (교회에 정착하여 목양하고 가르치는 자) 또한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늘의 가치로 사는 십자가의 영적 참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교회에 주셔서 세 가지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세가지가 순서를 이룹니다. 12절을 보세요.

이는 ①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②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③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이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를 통해 세워진다는 것이예요. 어떤 성도요 온전해진 성도를 통해서 세워지는데 그의 섬김을 통해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 두가지인데 먼저는 성도가 온전케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온전케 된 성도가 그 몸을 섬김으로 그 몸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온전케 라는 말은 카탈티 스모스인데 준비, 훈련, 완전, 자격이 완전함이런 의미입니다. 곧 여기에 목사와 교사의 사명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무엇입니까? 성도를 말씀으로 훈련하여 온전하게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처럼 온전케 된 후에 비로소 봉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케 된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온전함이 나옵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일이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자기가 만든 다른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되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인격적으로 그 분을 온전히 관계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이 에피그노시스인데 정확한 지식,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전 히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될 때 온전한 사람이 되어 다른 말로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결국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곧 그의 마음과 속성과 성품을 충만히 닮은 제자로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온전해 진다는 것은 예수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요. 그러한 온전한 제자가 되어 봉사하며 섬길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봉사는 디아코니아섬김, 돌봄, 사역, 사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주일에 나와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안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영광 스런 성도가 되려면 말씀으로 훈련되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제자로 온전케 되어 섬김의 사역을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만큼 헌신이 절실한 것입니다.

또 이처럼 성도가 온전히 무장되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세요? 교회를 세우는 것과 더불어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여 함이라

목사와 교사가 성도를 온전케 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분별을 못합니다. 사탄의 사람들의 거짓과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훈련받고 무장하여 부르 심의 제자답게 날마다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바울을 보세요. 오늘도 그는 주 안에서 갇힌 자 라고 합니다. 바울이 어느 정도로 헌신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바울의 헌신과 같은 헌신을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십니까? 아니예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갈 각오로 예수님 믿어야 하고 예수님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사탄과 사람의 속임과 유혹과 풍조에 분별없이 밀려 살수 없기에 온전히 훈련받고 분별하며 섬겨 그리스 도의 몸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그 때까지 감당할 수 없는 부르심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요, 성도로 거룩한 자존심을 지키는 그래서 하나님 왕국의 왕자다운 성품과 품위를 유지하는 성숙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

OCT. 12. 14. 주일강단 : EPH SERIES 6 기도하며 삽시다! 2


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6



기도하며 삽시다 2



-3:1421-
 

오늘 아침에 바울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의 기도에 이어 두번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그의 감옥 생활이 교회를 위한 기도의 생활이요, 말씀을 써서 보내는 선교의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14절에 보면 이러므로내가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러므로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복음이 이방인에서 전파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을 말하면서 에베소 교회 여러분이 바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합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선교적 기도입니다. 지금 이방선교를 하는 바울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 곧 천지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주인이시요,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비는데 물론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모든 족속을 품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기도는 좀 차원이 다릅니다. 그의 기도를 보세요. 놀랍게도 자신을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을 꺼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요. 오직 우리를 위한 기도요, 교회를 위한 기도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기도도 바울의 기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마음을 울리는 기도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사람들로 온전히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 두번째 기도에서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


16절을 보세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의 첫번째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의 겉사람을 위해 기도해요? 우리는 너무나 외적인 것, 드러나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을 간구합니다. 바울이 과연 그것을 몰랐을까요? 아녜요.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속사람의 강건부터 기도합니다.

그러면 왜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합니까? 속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겉사람을 지탱해 주는 내면의 나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거예요.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겉사람 또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속사람이 강건하면 세상의 그 무엇도 다 이겨나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속사람이 유약하면, 확신이 없으면, 속사람이 병들어 있으면 아무리 외부의 좋은 것을 갖다 주어도 싫은 것입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건하면 넉넉히 승리하고도 남습니다. 깊은 바다 속 물고기들이 어떻게 그 엄청난 수압을 이겨내는지 아세요. 물고기 내의 수압이 그 바닷 속 수압과 같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심해 물고기는 부레 곧 공기를 담아두는 주머니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요. 만약 부레에 공기를 갖고 있으면 조금만 압력이 높은데로 올라오면 다 터진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에 맞는 체액으로 차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안의 수압이 밖의 수압을 상쇄하면서 자유롭게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이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몇가 지 중요한 원리를 같이 기도하고 있어요. 막연하게 속사람이 건강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속사람은 다른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둘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셋째는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곧 성도의 속사람이 무엇으로 강해지는 것입니까? 세상의 신념이 아니예요. 인생의 경험 에서 오는 굳은 의지가 아니예요. 그런 것 하고는 달라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그 속사람 안에 가득차는 것이예요. 예전에는 세상의 허황된 영광을 담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갖고 사는 것이예요.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몰라요. 지난 화요일 제자훈련에서 자신을 언약백성 삼아 주심을 묵상해 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 마치고 집사님 한 분이 그것을 묵상하며 운전하고 가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묵상하는데 어느새 자신의 눈에서 언약백성 삼아 주신 것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밖에 내리는 비보다 더 많이 내리더래요.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 채워 사는 사람을 세상의 그 무엇이 이기겠습니까?

그 영광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곧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찬 속 사람을 말합니다. 오순절에 위로 부터 내리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전에는 유대인들의 한마디에 벌벌 떨었던 자들이예요.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가득차니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랴 사람을 두려워하랴고 담대히 말합니다. 채찍과 고문도 그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세상적이고 허황된 부레의 공기를 다 빼 버리고, 거기에 다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가득채우고,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세상의 어떠한 압력과 사탄의 공격에도 넉넉히 승리하는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게 하소서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바울의 두번째 기도내용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것인데 우리 번역이 좀 명확치가 않아요. 여기서 계시게라는 표현은 카토이케오라는 말인데 살다, 거주하다그런 의미예요.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예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 속에 함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해요.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어요.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크게 경험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자기 의로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늘 허무하고 답답
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어요. 평안이 없어요.

그러나 그가 나중에 어떻게 고백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사는 삶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옥에 갇혀 있어도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에 담대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성도의 속사람 안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고, 그 다음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바울은 먼저 믿음으로 주님이 우리 안에 살게 되는데 그 다음으로 무엇을 간구해요?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사랑에 아기의 마음이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지듯이 오직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뿌리로 부터 무엇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지요. 그 사랑의 터가 굳어져 어떻게 까지 자라가길 기도합니까?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 적인 사랑이 아닌, 머리로만 아는 사랑이 아닌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더 어떻게 알게 해 달라고 해요?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참으로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입체적인 사랑이 어떠할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가 어느 정도 일까요? 얼마나 광대하실까요? 시편 기자는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주님이 거기 계시다고 했습니다. 지평선, 수평선 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너비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지금 바울은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비는 우주를 넘어 끝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가 어떠함을 알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 분 길이는 시간으로 따질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저 잠시 있다 없어지는 사랑이 아니지요. 창조부터 재림까지요, 아니 그 너머 영원부터 영원까지요, 끝없는 사랑이지요. 무엇으로 그 사랑의 길이를 잴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그 불변하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높이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가 어느 정도일까요? 하늘만큼 일까요? 우주만큼 일까요? 성경은 삼층천을 말해요. 가장 높은 곳에 천상에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 자리 자기 우편에 앉히신다고 하세요. 그 높은 사랑을 감당할 수 있나요? 하늘의 상속자로 앉히실 그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에요. 바울은 이 높이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삼층천까지 갖다 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 땅의 성도들도 그 높이를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깊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 깊은 마음이시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아시나요? 과연 그 마음의 깊이를 우리가 얼마나 알까요? 깊이는 배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진정으로 우리가 깨닫고 알게 된다면 우리는 눈물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왜요? 지옥갈 영혼을 건져 천국의 상속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깊이와 자기 아들을 우리 위해 버리셔야만 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요. 과연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처럼 이 땅의 에베소 성도들, 우리가 하나님의 입체적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여기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여러분! 너비, 높이, 길이, 깊이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지요, 끝없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지요. 그 사방에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우리에게 충만케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합시다. 이런 기도드립시다. 이런 기도의 응답을 다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사랑을 받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그런데 바울의 이 엄청난 기도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기도가 더 이어져요. 20절을 보세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지금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이예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것에 더욱 넘치도록 부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이예요.

어떻게 보면 약간 이상한 사람 같지요?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하는 것 같지요. 아니예요. 이것이 성도의 삶과 비전을 정확히 가르쳐 주는 기도 예요. 우리의 두 발은 요동하는 세상을 딛고 있지만 우리의 기도의 두 눈과 손은 하늘을 향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로 부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부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옥과 가난이 바울을 낙심케 못하고, 부요가 바울을 교만케 못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스런 교회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직 주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받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작년 초에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의 교회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 후에 샬롯에 있는 숙소 까지 전도사님께서 라이드를 해 주셨습니다. 처음 뵙는 전도사님이었지만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삶을 나누었는데 참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전도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일하다가 소명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삼십 삼세 된 분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한국에 나가 동갑의 자매와 선을 보았는데 여섯번 만나고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꽃피는 봄이 되면 결혼예배를 드릴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제하는 자매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 다. 이 자매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답 니다. 졸지에 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된 것입니다. 자매는 동생들을 키우며 여상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 다행히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백오십여명이 넘는 직원들 가운데서도 실적 1위에 오를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들 학교 뒷바라지를 다 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유수한 명문 사립대에서 교직원 선출을 할 때 접수를 하였습니다. 자격조건에 부족했지만 지원을 했습니다. 담당 교수께서 자매의 삶의 성실함을 보고 한 번 인터뷰의 기회를 주자고 제안하여 모든 교수들이  면접을 했는데 그녀를 뽑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전도사님은 참으로 열심히 살아 온 자매의 삶에 감동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반려자가 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의 마음에는 늘 눌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부모님이 되실 분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부모없이 자란 사람’이란 자격지심이 있었습니다. ‘내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 까? 어떻게 반응하실까? 이것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의 가정은 부산이었고, 자매는 서울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자매에게 걸려 왔습니다. 시어머니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에 자매는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그 한마 디는 “지연아! 엄마다! 라는 외마디였습니다. 그토록 들어보고 싶었으나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배려와 위로의 이 한 마디가 자매의 수십 년 간의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과 상처를 모두 씻어 주었습니다. 얼마 후 부산에서 올라 온 시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봉투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엄마가 지연이에게 주는 첫번째 용돈” 자매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어느 덧 캄캄해진 노스캐롤라이나 파크웨이를 달리며 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이야기는 제 마음마저 녹여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룻과 나오미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의 한 마디가 상처난 다음 세대를 치유하고도 남습니다. “지연아! 엄마다!”이 어머니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얼마나 놀라운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