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25, 2014

JUN. 22. 14. LWC 주일강단 :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되라 (시19:1∼14)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되라

-19:114-


며칠 전 6 13일자 사이언스 저널에 미국 지구 물리학자들의 놀라운 연구 결과가 실렸습니다.

학자들은 지진계를 이용해 지구 내부 각층에서 일어나는 지진과 그에 따른 지진파의 속도를 측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진파의 속도가 맨틀 속에 있는 링우다이트(스폰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암석) 면에 닿으면 갑자기 낮아지는 것을 목격한 연구진은 그 안이 액체로 차있을 거라는 이론을 제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실 내에서 링우다이의 면을 재연해 보았습니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연구진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링우다이트는 수소를 끄는 힘이 있다는 걸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연구진은 지구 속에 제2의 바다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상위 맨틀과 하위 맨틀 사이의 전이점 곧410km ~ 660km사이에 링우다이트와 물의 결합 된 물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서 지구 수자원의 근원이 되었다고 믿어왔지만, 지하 저수지의 발견은 물의 근원이 바로 지구 속 깊은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획기적인 증거입니다. 노스웨스턴대학 지구물리학자 스티븐 제이컵슨은 "드디어 지구 수자원 사이클에 대한 총체적인 증거를 발견한 것 같다. 인간의 생존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지구 지면 위의 물이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며, 결국 물의 근원은 지구 내부라는 좋은 증거 "라고 밝혔습니다. 그 물의 양이 지구 표면의 바다와 모든 육지에 있는 물의 3배에 이른다고 합니다. (허핑턴포스트US, 조선일보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달에도 가고, 화성에도 우주선을 보내려고 하지만 아직 지구 속 1km밑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번 발견이 얼마나 지구 과학자들을 흥분 시키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학자들이 발견한 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찾아낸 것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성경과 과학은 다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과학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창세기 7:11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는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 이렛 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 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다고 했어요.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는 것은 창조시 하나님은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고 하셨습니다. 곧 지구 위 하늘 위에 물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1:6,7) 그래서 최적의 자연 환경속에서 사람의 년 수가 일천 년까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하늘 위의 물을 노아의 심판 때 다 쏟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땅속의 큰 깊음의 샘들이 터져 올라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150일 동안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까지 온 세상을 덮은 대 홍수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발견된 땅 속 깊은 곳의 거대한 물층이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의 성경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생명이 담보되어 있는 말씀이기에 진리요, 생명이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두 종류의 계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계시’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갈라’라는 말로, 신약에서는 ‘아포칼립시스’라는 단어로 쓰였는데 그것은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밝혀서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성경에서 계시 (revelation)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두 종류의 계시가 있다고 합니다첫번째는 자연계시 곧 일반계시입니다. 그것이 1절부터 6절까지 입니다.

거기 보시면 하늘과 궁창이 나오고, 날과 밤이 나오고, 그 하늘과 날과 밤이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는데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곧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자연이 무엇인가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연과 그 법칙을 통해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로마서 1 19,20절을 보세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 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만물 속에 자신을 드러내심이 곧 자연계시요, 일반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은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어두워 그것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계시를 주십니다. 그것이 두 번째 계시입니다.

두 번째 계시는 바로 말씀입니다. 이것을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 하셨습니다. 그것이 7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별계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와 성경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자기 아들을 친히 보내심으로 계시의 최종 완성하셨습니다. 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만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 합니다.

2. 말씀에 노출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 시인은 인간이 죄악 가운데서 어떻게하면 살아 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말씀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자신을 계속해서 어둠 가운데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숨기면 숨길수록 죄의 종으로 추락할 수 밖에 없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자신을 노출 시키면 살아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5,6)

여기서 ‘해’는 ‘말씀’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해에 노출될 때 그 빛으로 인해 살아나듯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우리의 영혼이 비쳐질 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부터 아파트 배란다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올 해는 다른 때보다 욕심을 내어 여러 채소를 더 심었습니다. 그런데 속이 좀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동 1층에 인도분들이 사는데 그 분들은 매년 집앞 입구에 채소를 화분에 심어 놓는데 얼마나 잘 자라 는지 모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출입구를 들어오고 나가면서 아내와 제가 연구하는 대상 입니다.‘와, 왜 우리 채소와 이렇게 다를까?’흙도 그렇고, 채소 종자도 그렇고 모두 같은 홈디퍼에서 사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집 채소들은 주렁 주렁 정글처럼 잘 자라고 열매도 맺습니다. 그런데 우리 것은 새벽기도 마치면 아침 인사도 하고, 물도 늘 주는데 더디고 약합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연구하던 중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 집 채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완전히 햇빛에 노출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배란다에 심었는데 햇빛이 앞쪽에 있는 채소에만 그저 몇 시간 살짝 비추고 마는 것입니다. 안쪽에 있는 채소들은 전혀 햇빛을 쐬지 못했습니다. 그 집 채소는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채소는 비도 제대로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해가 신방에서 나온 신랑처럼, 그의 길을 달리는 장사처럼 온 세상에 비춰질 때 자신을 온전히 노출한 채소와 간접 노출된 채소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아랫집 채소는 광합성(photosynthesis)을 통해 산소와 에너지를 만들어 왕성하게 자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채소는 광합성을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더디게 자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완전히 노출된 영혼과 그저 간접적으로만 살짝 노출 되는 영혼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노출되어 사는 사람 곧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영적 광합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속에서 영적 산소와 에너지가 막 쏟아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세상 살이에 시달리며 지쳐 있는 영혼은 영적 광합성을 할 수 없으니 생기가 없는 것입니다. 시들 시들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어떻게 영적 광합성을 하는지 아십니까? 7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여기서‘말씀, 증거, 교훈, 계명, , 법’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명의 말씀을 가리 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하세요?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 하고, 순결하고, 정결하고, 진실하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노출하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영혼이 소성 곧 살아나고, 우둔함이 사라지고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기쁘게 되 고, 눈이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곧 영혼이 살아나고 지혜가 넘치며 기쁨의 삶을 살고 눈이 밝아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영적 광합성이 잘되어 생명력 있는, 에너지가 넘 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10절을 보세요.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금을 더 사랑합니다. 많은 순금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곧 물질이 다 인줄 알고 그토록 물질만을 사랑하고 삽니다. 그러나 물질은 영혼을 소성케 할 수 없습니다. 지혜를 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마음의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눈을 밝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이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 곧 많은 순금 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오묘한 이 말씀을 먹고 그 말씀에 노출되어 살아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단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날마다 여러분 스스로를 영적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노출하는 삶을 사십시오. 성경을 펴고 부지런히 영적 광합성을 하십시오. 반드시 이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성경 금맥 통독은 언제나 여러분 에게 열려 있습니다.


3. 말씀에는 반드시 경고와 상이 있습니다.


11절을 보세요.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하세요. 하나는 경고한다고 하십니다. 운전할 때 노란불이 경고등입니다.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노란불을 줍니다. 운동에서도 레드카드를 주기 전에 엘로우 카드를 줍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노란불이 들어 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위험을 알게 해 주고, 안전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1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말씀의 경고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허물을 깨닫게 하고 숨어 있는 허물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씀의 경고는 우리를 고의로 짓는 죄로 부터 자유케 합니다.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를 정직하게 만들므로 큰 죄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노란불의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돌아보게 되고 바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경고를 받지 않으면 누구도 우리에게 바른 경고를 해 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으로 인생 길에 노란 사인을 받고 바른 길을 돌아보고 갈 수 있는 자가 복 된 자 중에 복 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경고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바른 길을 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을 주신다고 하세요? 큰 상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이 곧 상인데 그 말씀대로 사는 결과는 더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한 권의 소설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잃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지 않을 때에 여러분은 모든 것을 잃 게 됩니다. 오늘날은 픽션의 시대이지만 허탄한 픽션을 버리고 여러분 자신을 진리에 맡기십시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께서 믿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니 진리에 대한 애착심이 필요합니다. 진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임했을 때 진리를 여러분의 생명과 같이 취급하십시오. 그러한 이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고 여러분의 혀에 꿀맛이 될 것이며 여러분의 전대 속에 있는 금덩이보다 더 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다윗을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간교와 술수를 통해서 수천 번의 승리를 얻었다면 다윗은 진리 안에서 쫓겨 다니고, 패하는 것을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굴 속과 같은 캄캄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을 사모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진리와 은혜를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큰 상입니다. 결국 진리와 은혜는 다윗을 높은 반석에 올려 놓았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진리가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되어 주님 앞에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이 태양으로 인해 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여러분을 온전히 노출 시키십시오. 날마다 여러분의 입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약속대로 어두움은 물러가고, 생명 창조의 역사만이 넘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지켜 경계를 받고 행하십시오.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단 말씀의 역사가 날마다 여러분의 삶에, 우리 공동체에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Thursday, June 19, 2014

JUN. 15. 14. LWC 주일강단 :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니까? 미6:1∼8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니까?

-6:18-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금 브라질에서 진행되는 월드컵에 참여한 선수들은 우승컵을 높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축구선수로써 그 만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다른 말로하면 인간의 영광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분들을 성공한 사람들이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최고조로 드러나고, 최상의 성취에 다다른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영광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영광은 썩어질 것이요, 사라지고 말것이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의 영광은 영원하여 썩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요, 세상의 영광과는 전혀 차원히 다른 세계의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13:44) 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늘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광 중에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 함께 사는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배하면 단지 주일예배로 생각이 멈출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배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주일에 모이는 예배를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예배에는 삶의 개인적 예배와 공동체로 모이는 공적예배가 있는데 이 두가지가 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영광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예배 드리는 자가 예배는 드리는데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원하시는 예배, 곧 하나님께서 날마다 자기에게 나오는 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이 문제가 해결되어지므로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시고, 만나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전능자와 동행하는 은혜가 넘치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1. 스스로에게 물어라

6절의 첫구절을 보세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지금 선지자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할까? 라며 고뇌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스스로 성찰하고 묻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미가 선지자의 이러한 자문은 우리에게 큰 영성의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그러면 왜 선지자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사실 미가 선지자는 시대의 질문을 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시대는 어떠하였습니까? 미가는 남쪽 유다의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사역했습니다. 이사야와 동일한 시대에 사역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주로 남유다에 대해 예언을 했다면 미가는 북과 남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미가는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을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그 땅에 있는 백성과 모든 것들에게 자세히 들으라고 선포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서 임재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1:2) 그러면서 미가는 심판이 임하는 원인을 말하는데 그것을 한 구절로 이렇게 말씀합니다.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1:5b)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유다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산당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가 선지자는 성전 신앙이 산당 신앙으로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의 진단은 매우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당은 전형적인 샤머니즘의 중심지며, 우상숭배의 진원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산당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33:52)

성전이 산당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산당이 되었다는 것은 신앙의 기복화, 세속화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영적지도자들의 무당화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짓 지도자와 거짓 성도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은 자신의 복을 위해서만 신적 대상에게 구하는 것으로 철저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드리고, 모든 종교의식도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미가는 자기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 신앙을 떠나 산당 신앙으로 타락한 것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도 자문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지금 미가 선지자는 과연 하나님께 무엇으로 나아갈까? 송아지로 나아갈까?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으로 나아갈까?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기뻐하실까? 내 죄를 위해 내 아들을, 내 몸을 드릴까? 과연 이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까? 고뇌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대표적인 선지자가 18명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참으로 자기 시대를 끌어 안고 고뇌 하는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선지자가 하박국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 입니다. 하박국의 고뇌는 악인이 의인를 이기고 압제하는 것에 대한 고뇌였습니다. 곧 외적문제에 대한 고뇌였습니다. 반면에 미가는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의 고뇌였습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께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께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는 바로 미가의 고뇌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전 일제시대나 공산치하의 고난 때에는 하박국의 고뇌가 알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미가 선지가의 자기 성찰의 고뇌가 타락한 이 시대의 산당 신앙을 다시금 성전 신앙으로 회복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이 자기 성찰의 거룩한 고뇌가 저와 여러분 바로 우리 교회 안에 있을 때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고뇌가 우리 안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정의를 가지고 나아가라

바로 이 고뇌의 질문에 대해 미가는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그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6:8a) 그것은 세가지입니다.

먼저는 오직 정의를 행하며(6:8b)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정의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의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정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곧 정의의 삶을 살면서 그 정의의 삶과 그 열매를 예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정의가 없는 삶을 살면서 아무리 일 년 된 송아지를 드리고,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삶과 상관없는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데체 미가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까?

3:1을 보세요.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나라의 지도자들의 본분이 정의를 알고 정의로 통치하는 것인데 이들이 정의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9절에서는 그들이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들이 정의를 어떻게 미워했습니까? 3:2절 이하를 보세요. 지도자들의 죄를 말합니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3:5에서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말합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거짓 선지자는 밤을 만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에 정의가 사라진 것처럼 남유다는 어떠합니까? 10절 이하를 보세요.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 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나라의 통치자들과 선지자들, 제사장들이 이처럼 타락한 시대가 미가 선지자 시대였던 것입 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세요.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겠다고 하십니다.(3:4)

그리고 결국은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 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가는 이처럼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참 선지자로서 고뇌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타락할 때 그는 홀로 고뇌하며 결단합니다. 어떻게 결단하는지 아세요?
3:8절을 보세요.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고 해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진다고 했습니다. 소위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세요? 가장 영적인 것처럼 말하는데 삶에 정의가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덮고 오히려 돈을 위해 점을 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재앙이 없고 평강만 있을 것이라고 미혹합니다. 그러나 미가는 달랐습니다. 미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어 그 시대의 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요? 그것만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지금 세상에 정의가 있습니까? 공의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물질을 주님의 자리에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성전 신앙이 산당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그것이 미가서를 기록하신 목적입니다. 고뇌하여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면서 바로 정의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고치고, 정의의 삶으로 예배 가운데 나오라는 것입니다.(6:10,11,12)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정의의 삶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세요.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부정한 저울을 썼느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라고 하세요.그러니까 거짓 저울추로 불의한 재물을 얻지 않는 것이 정의의 삶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의 나눔 가운데 은혜를 받은 것을 나누겠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저울을 속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게에서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루에 일정량을 가져갔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계산대를 더 두들겨서 매상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산대를 두드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말씀이 생각나서 한달간 고민하다가 결단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고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때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깨닫게 되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의 삶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삶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송아지보다, 천천과 만만의 제물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고, 그 이상의 은혜를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이 놀라운 삶의 예배와 공적 예배가 일치하는 역사가 우리 안에 넘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인자를 가지고 나아가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번째로 가지고 가야할 것은 인자를 사랑하며 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정의고 둘째는 인자입니다. 그러면 인자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먼저 인자는 히브리말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인자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헤세드는 성경에서는 주로긍휼’(mercy),‘자비’(kind- ness),‘선함’(goodness) 이렇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다 포함하는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언약적 사랑」(covenant-love)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 사이의 사랑을 바로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선하심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헤세드를 사랑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실 때는 막연한 사랑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 언약에 기초한 확고 부동한 사랑을 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도 철저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적 사랑으로 인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이라는 언약을 기초로 해서 늘 서로 아끼며 사랑하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해 수도 없이 말씀하셨고 실천하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미가 시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 헤세드를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은 헤세드를 통해 모든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그들은 그 헤세드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미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에게 나아올 때 송아지나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기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형식적인 제물이 아니라 진정한 헤세드의 사랑으로 나에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헤세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믿고, 너희들도 사랑의 마음으로 나에게 나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인 것입니다. 그렇게 헤세드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사랑하며 나오는 자를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요? 생명 걸고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의를 행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곧 헤세드를 사랑하세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책임지실 것입니다


  4. 겸손함으로 나아가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곡식이 무르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믿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더욱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 자신을 진단할 때 어느 순간 교만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증거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다시 겸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겸손의 마음으로 항상 너의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겸손으로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성도의 첫번째 덕목이 겸손이요, 두번째도 겸손이요, 세번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곧 겸비함 가운데 늘 하나님을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결국 베들레헴에서 다스리는 자 곧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곧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정의와 헤세드와 겸손이 하나님과 행하는 나라가 세워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소망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렇게 마칩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7:19,20)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버지의 날 예배를 드리면서 참으로 우리 LWC의 모든 아버지들이 이런 아버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진정으로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아내와 자녀들의 기쁨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