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4, 2014

FEB.23. LWC 주일설교 :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 (히11:8∼16)

이번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고 있는 동계 올림픽에서 큰 이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러시아 이름은 <빅토르 안>, 안현수 선수입니다. 안 선수는 본래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였는데 러시아로 귀화를 하여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 3관왕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올림픽에서 통산 6개의 금메달과 2개의 동메달로 쇼트트랙 황제에 오른 선수입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까지 나서 안 선수가 왜 러시아로 귀화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돌아 볼 것을 권고했습니다. 알려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안 선수는 쓰임 받고 싶어 러시아로 귀화한 것입니다. 결국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서는 메달이 하나도 안나왔는데 안 선수는 금메달을 세 개씩이나 러시아에 안겼습니다. 아마도 운동에 대한 절실함이 더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빅토르 안>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어디서든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잘 쓰임을 받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면 사실 그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과 이 미국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사용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처럼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반면에 쓰임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의 모든 인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 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증거하기 원합니다.

1. 부르십니다.

8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사용하시기 전에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어, 자기 앞에 세우십니다. 이 부르심 곧 Calling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구원하심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점은 각 인생에 따라 다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구원과 사명입니다. 이 부르심을 통해 사람을 사용하시는 첫 출발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라고 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 순종입니다순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겠다는 것인데 곧 미래에 대해 알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지만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으로) 나아 갔다”고 했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에 대해 감격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사무엘을 보세요. 그런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여호와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이것이 이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한 첫번째 모습입니다. 그의 평생이 늘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처럼 온전한 순종과 감격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약속을 주십니다.

9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용하실 사람을 부르신 다음에 반드시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약속과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을 먼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우리 인간은 약속을 하고도 얼마나 쉽게 그 약속을 저버리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그리고 생명을 담보해서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우리는 인생 가운데 식언을 많이 하므로 하나님의 약속도 그럴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약속 곧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다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바로 이 약속과 성취 사이에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고, 그 곳이 믿음의 자리입니다그러면 그 약속을 누가 받습니까? 아브라함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이 함께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나 자신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내, 나의 자녀, 나의 자손이 함께 받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약속을 나의 이웃, 나의 민족, 아니 모든 민족이 받아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만이 인간의 유일하고 영원한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인생의 작은 소원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약속은 온 우주적, 역사적, 영원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인생의 구체적인 삶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각 사람에게 다르게 오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동일한 약속인데 그 동일한 약속을 각 시대마다 각 사람마다 받는 것입니다9절 중반절에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각기 다른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동일한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도데체 약속이 무엇입니까? 약속은 곧 유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업은 무엇입니까? 유업은(heirs: τῶν συγκληρονόμων) 원뜻이 <공동 상속자>를 말합니다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공동 상속자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면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동일한 약속 곧 공동 상속자로 약속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부르신 자에게 주시는 약속은 보통 약속이 아니예요. 그 약속은 사실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참으로 감당 할 수 없는 영광의 약속인 것입니다그리고 함께 더불어 장막에 거했다 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땅의 장막에서 더불어 거하면서 함께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세상의 약속, 사람의 약속이 아니라 우주의 왕이시요, 통치자인 왕의 공동 상속자로서 세우신다는 이 놀라운 약속을 받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3. 비전을 주십니다.

10절을 보세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부르신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바라보는 것입니다. 곧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있는 사람은 살고, 비전이 없는 사람은 죽습니다. 비전은 꿈입니다.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답은 꿈이 사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꿈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비전이 이렇게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 비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 인생의 작은 꿈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꿈을 현실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지으실 성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그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 상속자로 삼아 주셨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감이 안나시지요? 빌게이츠가 여러분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다 상속하겠다고 하면 실감이 날까요? 이건희 씨가 여러분에게 삼성의 모든 것을 다 상속하겠다고 하면 실감이 날까요사실 그러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 상속자로 약속하셨다는 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작고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고, 약속을 받고, 비전을 받은 자가 얼마나 복 받은 자인지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우리는 너무 현실적입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 결핍과 연약함이 많아 그저 현실 문제라도 제대로 해결 되었으면 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 문제도 외면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구체적 으로 계획하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방패되시고, 바로와 아비멜렉 가운데 아브라함이 실수로 위기에 처해도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현실의 문제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공동 상속자로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영원한 성을 계획하고 지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장막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동일한 약속을 받아 공동 상속자가 가족들, 성도들과 더불어 소망 가운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 가 있는 성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사용하십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비전을 주시며, 이제 비로소 사용하십니다12절 중반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 한 사람을 사용하심으로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노아 홍수 이후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의 대표로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용하실 때 아무때나 쓰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철저히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아브라함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준비되었습니까12절 상반절을 보세요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예전 한글 성경에는 “죽은 자와 방불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11절에도 보세요.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너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신체적, 의학적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니 의지적으로도,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절망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이지요. ‘죽은 자와 같은’ , ‘죽은 자와 방불한그런 상태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쓰임 받기 위해 인간적, 세상적 기준으로 여러가지를 준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쓰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상태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얼마나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역사 가운데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준비와는 완전히 다른 준비를 시키십니다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적 소망이 끊긴 상태, 나의 그 무엇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려놓는 순간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비로소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출발점입니다그전까지는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그런데 시간은 흐릅니다. 약속은 거짓 같습니다. 비전은 꺽여 절망의 상태에 놓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부도수표처럼 여겨지는 상황까지 몰고 가십니다. 진짜 그렇게 자기 사람을 다루십니다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아무 소망이 없다고 탄식하며 자기 의와 자기 능력을 완전히 포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이제야 너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를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가 40세의 지식과 혈기가 왕성할 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애굽사람을 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학문을 통달하였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오히려 도망자가 되어 모든 인생의 꿈을 잃어버리고 80세의 미디안의 양치는 노 목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몇 번이나 확신을 주시고, 표적을 보여 주시며, 사람까지 붙여주시는데도 모세는 !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이것은 모세의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제야 모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도, 요셉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15세때 골리앗을 쳐 죽였을 때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거의 15 30세가 될 동안 죽은 자가 되었을 때 사용하세요. 요셉도 17세에 비전을 주셨지만 30세까지 모든 수모를 다 겪은 후에 죽은 자처럼 되었을 때 사용하시 잖아요만약 그들이 혈기 왕성할 때 사용하시기 시작하셨다면 그들은 분명히 제대로 쓰임받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다 똑같음을 하나님이 너무 잘 아신 것입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내세울 것이 있으면 교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각자가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시점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것을 간파했어요. 내가 살아 교만해지면 하나님 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는 평상시에도 죽음의 영성, 죽은 자와 방불한 영성을 날마다 유지한 것입니다. 그의 자랑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유일하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은 자와 방불해 질 때가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임을 잊지말고 날마다 나를 죽이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1)  쓰임의 열매 어떻게 무엇을 위해 쓰십니까? 구원 백성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약속 밖에 있는 자들을 공동상속자로 초대하는 초대자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영광의 쓰임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을 목회했습니다. 이삭은 둘을 했습니다. 야곱은 12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하늘의 허다한 별와 해변의 무수한 모래가 된 것입니다. 

(2) 쓰임의 자세 사모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16) 공동상속자로서 우리가 도착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주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3) 쓰임의 시한 – 쓰임에도 다 때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쓰임은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입니다. 그 때까지 잘 쓰임 받다, 잘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부르심, 약속, 비전, 쓰임에 대한 전체적 태도와 반응을 한마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믿음으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믿음이예요. 6절을 보세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부름받고, 약속을 받으며, 비전을 바라보며, 겸손히 쓰임받는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폭풍이라도 그것을 일으키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폭풍을 뚫고 올라가 그 윗 세상의 평온 가운데 달려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만을 믿고 순종하여 나아가는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LWC 말씀으로 사는 교회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굳건히 세워져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 존귀하고 겸손하게 쓰임 받다 하나님이 지으시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성 우리의 본향에 함께 안착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FEB.16. LWC 주일설교 :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삿7:1∼8)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모임을 소위 멘사라고 합니다멘사(Mensa) 가장 크고 오래된 고지능자의 모임입니다멘사라는 이름은 둥근 탁자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비영리 단체로서비정치적이면서인종  종교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인구대비 상위 2% 지능지수를 가지면 가입할  있습니다현재 회원이  11만명이 된다고 합니다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모임이 멘사인데 아이큐 148이상입니다보통 사람의 아이큐한국인의 경우는 106-110 이라고 합니다또한 보통 사람의 50%  자리수 라는 통계도 있습니다그러므로 멘사에 속한 사람은 인류의 상위 2% 소위 천재들의 모임이라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이큐는 얼마입니까성경은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다고 하셨습니다굳이 표현 한다면  ‘무한대’ 이십니다이제 계산해 보세요. 100 겨우 넘는 세자리  아이큐를 갖고 사는 우리와 무한대의 전지함을 갖고 계신 하나님누구의 생각과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을까요이렇게 말해도 모른다면  사람은 정말 아이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이어령 교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책을 썼습니다 책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지성을 넘어  다른 영성의 세계가 있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를 밖에 없습니다. 차원이 다를 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그렇게 보일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때로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믿음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 전혀 생각지 못한 결단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표현 하심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뛰어 넘는 초월적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이 필요한지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증거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수학이 다르다.

1절을 보세요.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룹바알(Jerub-Baal) “Let Baal Contend with Gideon” / “바알이 기드온과 맞서 싸우게 하자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이유 하나는 바알을 부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의 집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내시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6:25) 명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그대로 하였고 당시 미디안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깨뜨린 기드온을 죽이려고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이 스스로 기드온과 맞서게 하라고 만류하여 얻게 별명이 바로 여룹바알 입니다.  사단이 맞서야 하는 용사가 되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룹바알은 단지 기드온 개인의 별명이 아닙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집 마다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시대 회복의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드온 개인적으로는 바알을 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이 맞서는 영적 전쟁으로 확대 되는 것입니다.  시대도 사단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정에까지 침투하여 들어옵니다.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를 섬기도록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의 바람과 비의 신이요, 풍요의 신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맘몬 물질의 신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을 우상으로 섬겨며 사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여룹바알과 그를 따르는 백성과 미디안이 전장의 복판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적군은 수는 얼마입니까? 7:12절을 보세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사람은 메뚜기의 많은  , 낙타는 해변의 모래같이 많다 했습니다. 적어도 수십만명은 훨씬 넘는 수입니다. 이에 비해 기드온 여룹바알과 함께 군사는 얼마입니까? 처음에는 3 2천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7:2) 하십니다. 적군은 몇입니까? 수십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2 2천명이 돌아갔습니다.  명만 남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아직도 많으니”(7:4) 라고 하십니다. 적군은 수십만인데 명이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수를 정리하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을 마시는 태도에 따라 사람이 나누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에 대고 마신자 9 7백명과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 마신  3백명 중에서 경계 태도가 좋은 3백명을 택하셨다고 봅니다.  해석도 맞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3백명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그들이 물을 그렇게 마셨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4절을 보세요.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르켜 네게 이르기를 사람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르켜 네게 이르기를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것이라 하면 그는 가지 것이니라 하신지라

말씀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된 3백명을 아셨고, 그들로 하여금 물을 그렇게 마시도록 역사 하셨음이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9 7백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오직 3백명으로 이스라엘 구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처럼 3 2 명에서 300명으로 1/100 줄이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3백명의 하나님의 수학의 답은 무엇입니까? 물론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답보다 더욱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긴 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 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이기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 해결하시는 수학의 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2b 보세요.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인간이 이렇게 연약해요. 조금만 수가 많으면, 무엇인가 이룬가 싶으면 하나님을 거슬러 자랑하고 내가 했다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주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수학은 우리의 계산과 반대일 뿐만 아니라 답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우리가 우리 됨으로 자리매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승리와 겸손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공식입니까?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하나님과 분이 하시는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다수가 아닌 소수로 일하신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사람이 많아야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 ? 그렇치 않습니다. 세상은 창조적 소수가 이끌어 나갑니다.

? 여리고, 아이성에서는 모든 자들이 군사로 싸우게 하셨는데 기드온 시대에는 300명으로 줄이 십니까? 여리고와 아이성 싸움은 가나안 초기 정복 사건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처럼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시대의 패러다임이 교만하여 타락하는 역사를 반복하니 겸손함과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소수만으로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보이심으로 겸비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다수가 아닌 소수를 통해 하나님 살아계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수와 소수를 신약적 용어로 풀면 무리와 제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무리를 통해 일하지 않고, 제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3 2천명이 300명으로 줄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지 않는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늘어나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대형화가 善이 되고, 대형화가 義가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속적 가치가 교회마저 침범해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커져야 하고, 커져야 무슨 일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떠합니까?  만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비전은 작아지는 것인가요? 소수로 머물고 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영혼 전도해서 구원하고 진정한 제자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자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면 건강한 중소형 교회들로 분립해야 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만, 수천, 수백명에서 수백명이 좋습니다.  이상되면 교만해집니다. 섬기기도 어렵습니다. 스치는 목회를 하고 맙니다. 욕심 버리고 중소형 교회들이 알차게 세워져야 합니다.

최근에 개척한다니까 많은 분들이 기도와 격려를 주셨습니다.  어르신 목양자의 조언이 마음에 녹아들었습니다. 소유론적 목회가 아닌 존재론적 목회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유론적 목회는 교회가 자꾸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더욱 커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홀로 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론적 목회는 교회가 존재하는 자체로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지역에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목회입니다. ‘! 우리 지역에 이런 교회가 있네!’ 하고 감동하게 하는 목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도가 위로 받으며 불신자에게까지 칭송받는 목회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그런 존재론적 교회였습니다. 이번에 보스턴에 가서 보스턴 마라톤 출발지에 세워진 보스턴 장로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 바로 앞에서 보스턴 마라톤이 출발합니다. 그래서 교회 체육관은 매년 마라톤 선수들이 준비 운동을 하고, 출발하는 곳이 되었답니다.  교회 담임목사님 방에 와서 쉬었던 이봉주 그리고 다른 해의 케냐 선수가 우승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교회는 미국교회였는데 한인 교회가 샀다고 합니다. 100만불 준비했는데 처음에는 70만불,  다음에는 60만불 이면 됐다고 그렇게 팔았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바로 교회에서 전덕영목사님이 29년간 목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교회가 커지는 것이 싫어 이제까지 7교회를 지역에 세웠다고 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귀한 분이요, 감동 자체입니다. 보기 드문 존경받는 목사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 세우는 것이 꿈입니다. 

우리 LWC 그렇게 갑시다! 작지만 강한 3 용사와 같은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를 곳곳에 개척하여 드립시다! 우리 안에 이런 선한 소원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서 크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런 비전을 말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실천해야 할까요? 실제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지난 예물부터 교회 차원의 십일조를 미래의 교회들 개척을 위한 Seed Money 구별하여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 교회 헌금의 십분의 일을 다음 교회 개척을 위해 준비하기 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회 하나가 워싱톤에 있는 세이비어 처치입니다. 150 정도 모이는데 1 지역 선교, 구제비만 백만불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역의 영혼들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라서 못한다는 것은 패배의식이요,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작지만 하나님께 붙들리어 쓰임 받으면 그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보잘 없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기드온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3백명 남았는데 이제 가서 수십만을 물리치라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적군 가까이 내려갔을 하나님은 보초병들을 통해 꿈과 해몽을 하시므로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보리떡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에서 엎으니 장막이 쓰러지더라”(7:13)

3백명은 보리떡 덩어리에 불과해요. 어떻게 보리 한덩어리가 굴러와 장막을 무너뜨릴 있습니까? 그냥 보리떡 덩어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보리 덩어리 라면 다릅니다.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이 감당할 없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의 순종과 헌신의 떡으로 오천명을 남긴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존귀히 하나님께 쓰임받는 말씀으로 사는 교회를 세우기를 소원합니다!

 3.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

사실 다수가 아닌 소수로 역사하셨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 홀로 역사하실 있습니다. 기드온과 3 용사가 없어도 하나님이 미디안과 연합군을 얼마든지 물리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과 같이 하십니까? 우리와 함께 사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동역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과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훈련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 가시는 거예요. 동역할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과 3 용사가 것은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순종 뿐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은 믿음을 가져오고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100명씩 3대로 나누어 양손에 나팔과 횃불을 감춘 항아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나팔을 대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어 횃불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단지 나팔 불고 항아리를 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어떻게 수십만명을 이길 있습니까? 22절을 보세요.

삼백명이 나팔을 때에 여호와께서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것은 하나님 말씀에 확신을 갖고 순종한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대한 사탄의 세력을 이길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하면 놀라운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있었습니까? 다윗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3:21,2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뜻을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폐하시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처음에 사울 왕이 얼마나 겸손했 습니까? 그러나 그가 왕의 권력에 도취되어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하나님도 그를 버렸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145) 이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이 왕인데 하나님을 왕으로 노래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은 자신의 자리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왕이 위에 왕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을 버리면 확신할 없고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기드온처럼,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와 영광입니다.

 4.   시대의 기드온과 3 용사로 쓰임 받으라!

기드온과 300 용사의 특징을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8 4절을 통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지막 시대에 LWC 이런 용사들이 되길 원하실 것입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구절이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마디로 규모있고 성실한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아끼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수학을 믿은 자들입니다. 적군의 숫자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피곤의 본성을 이기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한 자들입니다.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이렇게 헌신할 어떤 역사가 일어났나요? 723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소수가 헌신하니 다수가 용사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갔던 자들이 용사가되어 다시 적을 추격하여 함께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형입니다. 12제자를 통해 70명을 깨우시고, 70명을 통해 120명을 깨우시고, 120명을 통해 500명을 깨우십니다. 지금 시대는 특히 그렇습니다. 지금은 개인 블로거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시대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대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사들이 절실합니다. 우리 LWC 시대의 교회를 깨우고,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소수 첨병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에 사로잡힌 소수가 세상을 얼마든지 뒤집을 있습니다. 건강한 중소형 교회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그렇게 가야 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에 확신을 갖고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두려워 도망치지 말고, 무력한 다수 편에 서지 말고,
손으로는 말씀의 나팔을 불고, 
손으로는 성령의 횃불을 듭시다!
항아리를 깨듯 우리 자신의 죄성과 교만을 깨십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선포합시다!
사탄이 맞서는 시대의 여룹바알이 되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승리의 용사들이 됩시다!

주여
LWC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주의 용사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