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9, 2014

MAY. 25. 14. LWC 주일강단 : 십자가 공동체 위에 부어진 성령 (행1:4∼5)




십자가 공동체 위에 부어진 성령
-1:45-




성경은 교회가 버림받은 돌이신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기초가 되어 그 위에 터와 기둥과 그리고 벽돌 하나 하나 지붕까지도 모두 십자가 예수님의 DNA로 세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기인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돌과 그를 닮은 작은 돌들을 최고의 보석으로 만드셔서 결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시작과 과정과 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히 따라 다닌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처음부터 열정적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누구도 그의 열정을 이기지 못할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과연 무엇을 하시려는지도 모르고 따라다닌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알게 되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결국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십자가도 부활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했지만 곧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 하시니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님을 붙잡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라 다녔고, 주로 고백했지만 곧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온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변화되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사도행전4:11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몇일 전에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예수 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예수님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 을 말합니까? 베드로가 드디어 하나님이 건축자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는 몰랐어요. 그는 그저 예수님의 기초 위에 자기 명성, 자기 공로, 자기 포지션을 쌓아 올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교회인줄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세우려고 그렇게 서로 싸웠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알게 된 것입니다. 건축자 하나님의 뜻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과 그 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건축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갈보리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을 체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위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을 직접 경험한 사도가 됩니다. 그 이후 그는 완전히 변화됩니다. 그는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교회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어떻게 세워져야 하며, 어떻게 자라가야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제물 위에 세워진 교회와 십자가의 원리로 세워지는 교회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위에 하나를 더 부어주심을 경험하게 되요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거룩한 성령이십니다. 곧 교회를 십자가와 성령의 공동체로 만드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이 세우시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세우시기 원하시는 이 두 가지 곧 온전한 십자가와 거룩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를 성령의 공동체로 만드십니까?


   1. 성령 공동체로 만드시는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까? 제사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려는 것이 대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문제가 있어요.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함께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인간은 죄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피흘림이 없이는 절대 죄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제사를 통해 인간 대신 어린 양이 피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세요.  

그래서 구약의 제사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 함께 사는 과정이예요. 따라서 제사에서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제물을 죽여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제단에 태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제사드리는 자와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게 되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아세요?

레위기 9:2224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역대상 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역대하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니

열왕기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지금 구약성경에 네 번에 걸쳐서 하나님으로 부터 불이 내려온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의 시대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제단과 제물 위에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불이 제단과 제물에 내려왔는데 이것이 순서예요. 어린 양을 잡아 제물을 제단에 드린 후 하나 님께서 그 제사드린 자와 제물을 기쁨으로 받으시면 그 다음에 하늘로 부터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결코 불이 먼저 내려오고 그 다음에 제물을 올린 것이 아니예요. 제물이 먼저고 그 다음에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제물되셔야지만 그 다음에 하늘로 부터 불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체험하기 원하시지요? 성경은 성령을 한번만 체험하고 추억으로 삼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5:18절에 보면 성령충만을 계속해서 받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온전한 제물로 드려질 때 비로소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무데나 오시는 것이 아니예요. 성령은 오직 십자가의 제물 위에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되지 않고 성령을 받으려는 것은 욕심이예요. 잘못된 것입니다. 뭘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그저 신비한 은사나 능력을 소유하고 싶어서 성령을 달라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불을 받아요.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삶에 제물됨이 없는 엉뚱한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어느 교회에서는 그토록 성령을 사모해서 교회가 뜨거운데 예배마치고 나가면 서로 먼저 나가려고 교통질서를 무시하고 신호등도 다 무시하고 갑니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성령받은 것은 현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 아는 것이예요. 성령은 우리가 온전한 제물되어질 때, 곧 내가 철저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죽을 때 역사 하시는 것이예요. 이것이 원리요,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이 바로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되심 후에 성령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단과 제물 위에 불이 내린 것은 모두 이것을 예표하는 것입 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온전한 제물되고 그 위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나아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2.어떻게 십자가 공동체를 성령 공동체로 만드십니까?

1:4,5을 보세요.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먼저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라고 하세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약속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하셨다는 것은 성령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날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고 승천하여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몇 날이 중요합니다. 이 몇 날은 시간적으로는 보다는 영적으로 중요해요. 그들이 무작정 몇 날 동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 예요. 교회 공동체가 매일 모여 온전한 십자가의 제물이 되며 기다리는 것이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본질을 이제 깨달으며 그 안에서 자기들도 죽고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예요. 120명의 성도들이 날마다 모여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 마음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하신 성령을 공동체가 받는 자세입니다. 곧 십자가의 제물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다 흩어진 자들이요,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이제야 비로소 십자가 위에 세운 공동체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동일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여야만 합니다. 기도 가운데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께서 우리 공동체에도 강하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오순절에 어떻게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2:3을 보세요.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불의 혀처럼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각 사람이 다 온전한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만 불이 임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제물된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령이 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제물이 되지 않았는데도 성령을 받았다고 해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처럼 위험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제물이기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120명의 성도들에게만 부어지나요? 아니예요. 2 38, 39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누구든지 회개한 자에게 선물로 주신다고 했어요. 회개는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하여 돌이키는 것이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해요. 곧 십자가의 제물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사함을 받아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만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이 오셨습니까? 오순절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물 되시고 부활 하신 후 지상에 40일간 계셨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 안식일 다음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니 승천하신 후 열흘쯤 되서 임하신 것입니다.(레23:15)  

그러면 성령은 2천년전 오순절에만 오시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2:18,20 보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까고 곧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을 부어 주십니까? 오순절을 다른 이름으로 맥추절, 초실절 이라고 합니다. 보리를 첫 추수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곧 영적 추수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순절의 120명의 성도가 십자가 새 언약의 첫 추수가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동시에 바로 이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위에 성령의 능력으로 입히셔서 성령 공동체를 통해 추수의 역사를 계속해서 해 나가시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이 오셔서 추수하 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 공동체가 온전한 십자가의 제물로 날마다 나아갈 때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 추수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합 니다.


    3. 성령 공동체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온전히 제물되는 공동체가 더불어 성령의 공동체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떠한 열매입니까

2:11을 보세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숨어 있던 자들이, 말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회개를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15개 지역에서 모든 자들에게, 그들에게 선교가 시작되고 선포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공동체의 열매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정한 공동체로 회복됩니다

4447절을 보세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었어요. 곧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물질로 어려운 자, 힘든 자를 서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나누고 섬길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할 때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한다고 했습니다. 동일한 성령 안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날마다 성전에서 모이고 집에서 모였습니다. 모여서 떡을 떼며 예배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5:42)고 했습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건강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3:6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은과 금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와 성령으로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전에 없던 것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 개인도, 초대교회도 이제 한가지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우리 교회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이름의 능력을 확인하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개를 바친 소년처럼 그렇게 내가 할 수 작은 것들로 주님께 헌신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축사하셔서 오천 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과 열매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성령 공동체의 열매가 행3:12,15절에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너희가…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여기에 나타난 십자가와 성령 공동체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기 전에 베드로는 3년 내내 가장 높은 자가 되길 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12명 가운데 가장 높아지고 싶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변화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치고 나서도 자신의 권능과 경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자기 겸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자의 제물되고 그 위에 성령의 부음을 받은 사람과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진정한 십자가 공동체와 진정한 성령 공동체는 더 이상 자기를 높이지 않습 니다. 자기를 주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직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우리 LWC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오직 건축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일을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진행하고 십자가로 끝내는 교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진행하고 성령으로 마치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참된 십자가와 성령의 교회가 되어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증거하는 교회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Thursday, May 22, 2014

MAY.18.14. LWC 주일강단 :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마21:33∼46)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21:3346-


세계적인 여배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의 아름다움보다도 그의 인생의 후반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아이들을 위해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실천적 삶을 산 것이 더 아름다웠던 삶을 살다 간 분입니다. 바로 오드리헵번입니다. 그녀는 은퇴 후에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하게 되는데  2차 세계 대전으로 식량 난에 시달리던 시절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구호기금을 통해 어머니와 자신이 살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유니 세프를 통해 세계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 전쟁터와 전염병이 있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갑니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는 열정으로 섬기다가 1993년 대장암에 걸려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딸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시를 유언으로 남깁니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을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 중에 한 명을 뽑으라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전술로 당시 세계의 패권국인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시리아와 이집트 까지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동쪽 끝인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던 인물입니다.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를 융합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일으켰고 그 문화는 지금까지도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그의 신하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거든 묻을 때 손을 밖에 내어 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시오. 천하를 한 손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 손으로 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있을 것인데 유언을 할 수 있는 것이 복된 인생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언의 말씀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놀랍게도 오늘 아침에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33년의 생애를 마치시는 마지막 주간에 남기신 유언적인 말씀입니다. 마지막 십자가 지시기 직전까지도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유언적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거짓이 주인의 것을 빼앗습니다.

33절을 보세요.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포도원을 세로 얻는 자들은 농부들인데 이들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후에 열매 거둘 때가 되어 그 열매를 받으려고 주인이 자기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십니까?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고 했습니다.

농부 들이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주인의 포도원을 삼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농부들의 목적 입니다. 농부의 역할은 주인이 세로 준 것을 잘 농사하여 주인께 열매를 드리고 자신들이 취할 것을 얻는 것인데 아예 포도원 자체를 가지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사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입 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최고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고 잘 세워야 했는데 유대교를 통해 자기의 이익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성전과 그 백성을 삼켜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어떠한지 아십니까? 요아킴 예레미아스가 쓴「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란 유명한 책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오직 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헤롯과 로마통치시대 106년 동안 무려 28명이나 대제사장이 등장해요. 이중 25명은 평범한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비합법적으로 귀족으로 부상해요. 단시일내에 강력한 신흥지배계급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권력정치를 이용하여 가족과 친족을 세워 성전 요직들을 차지하고 세금과 돈을 수중에 넣은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백성이 고발한 유명한 고소장이 역사에 남아 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나는 대제사장의 가문과 그 가문의 횡포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이들은 대 제사장이요 그의 아들들은 성전창고 책임자요 그의 사위들은 성전감독이요 그의 하인들은 곤봉을 가지고 백성을 구타하기 때문입니다.”      

45,46절을 보세요.

대제사장과 바라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당시의 하나님의 포도원을 누가 빼앗았습니까? 농부들로 비유되고 있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거짓의 종들이 주인의 포도원을 강탈하고 그의 백성을 무참히 고통 가운데 몰아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세로 받고 있는 주인 것을 자기 것으로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인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2.   거짓이 진리를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당분간은 거짓이 진리를 이깁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36절을 보세요.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7:25절을 보세요.

너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고 또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보냈다고 하세요? 출애굽 한 때부터 곧 모세로 부터 시작해서 유다가 멸망당하는 때 곧 예레미야 시대까지입니다. 사실은 구약 끝의 말라기때까지 보내시고 보내셔요.

그런데 그들이 듣지 않았어요.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목을 굳게 하여 악을 행했 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종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3 35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기보면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가 나옵니다. 아벨의 피는 가인이 흘리게 한 것이고, 사가랴의 피는 요아스 왕 (남 유다의 8대왕, 대하24:1527 참조)이 흘리게 한 피입니다. 그런데 아벨과 사가랴의 피는 구약의 시작과 끝의 시점을 말해요. 그러니까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거짓이 진리를 이기는 패턴이예요. 거기에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도 한 몫을 한다고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잘 보세요.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벨은 그와 그의 제물 때문에 죽임을 당해요, 그런데 사가랴는 성전과 제단 사이 거룩한 곳에서 무참히 맞아 죽어요. 아벨은 자기 형에게 사가랴는 자기 아버지로 여호야다로 부터 큰 은혜를 받았던 요아스 왕으로 부터 배반 당해요. 거짓이 진리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살 때 오는 고난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셔야 돼요. 그런데 주인이 더 이상 종들을 보내지 않고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 아들을 보냅니다. 37절을 보세요.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주인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고 보냅니다.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이들이 왜 아들을 죽입니까? 그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끊임없는 거짓의 유혹이요 욕심입니다. 주인의 아들을 부정하고 죽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예요.

여기서 사탄의 거짓 세력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보세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포도원의 권력이요, 유산이요, 소유에 대한 탐욕이예요. 그러나 진리 편의 종들과 아들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오직 주인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권력과 부와 탐욕에 빠져 진리를 거스리고 핍박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되신 주인의 뜻을 이루고 심지어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할지라도 거짓이 아닌 진리편에 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   두 건축자가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은 진리를 박해하고 죽입니다. 이것이 태초부터 재림 때까지의 거짓과 진리의 싸움 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40,41절을 보세요.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궁극적으로는 진리가 거짓을 이깁니다. 거짓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다시 경영할 새로운 농부들이 세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4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두 건축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탄입니다. 사탄도 건축을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건축자들이라고 한 그들이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 자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인가 건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건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인을 거역하고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빼앗아 자기 왕국, 자기 권력, 자기 소유, 자기 탐욕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 건축물의 최고 설계자는 사탄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당시 유대교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다 건축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성전 중심의 모임을 장악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완전 장악을 한 것입니다.

이 건축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은 무참하게 때리고 죽이고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건축의 목표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이 진리를 죽이고 버리고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다른 건축자가 있다고 말씀하세요. 그 건축자는 바로 앞의 건축자 곧 사탄이 버린 돌로 모퉁이 돌을 삼고 머릿돌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 건축자가 바로 누구십니까? 하나 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건축자이신데 사탄에 의해 버린 받은 돌을 기초석으로 삼고 그 위에 건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건축하십니까? 바로 작게는 교회요 크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고 그 위에 세우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원리를 정확하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다고 하셨습니다

첫번째 건축자들이 왜 예수님을 버립니까? 자신들의 가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았다면 그 돌을 사용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가치로 사시는 분이고 그들은 땅의 가치로 산 자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아담의 높아지고 자기지위를 넘어 하나님처럼 되려는 가치로 산 자들이고 예수님은 철저히 낮아지려는 가치로 사신 분이기에 안 맞습니다. 자신들에게 안 맞으니 죽이고 버리는 것입 니다.

교회는 바로 이 예수님의 가치, 하늘의 원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으로 부터 버림받은 가치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어 버린 가치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를 보세요. 이렇게 기초석이 놓아졌고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그 위에 거꾸로 세상적 가치로 벽돌을 올리고 지붕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의 교회가 바로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부터 버린 받은 돌을 교회의 기초석과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 먼저 버림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후에 버림받은 신약의 사도들로 터를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2:2022)

그러면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은 기초와 터 위에 어떤 벽돌을 세우고 어떤 지붕을 올려야 합니까? 바로 동일하게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은, 곧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벽돌 한 장 한 장, 작은 돌 하나 하나를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도 그렇고 지붕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벽돌 한 장 한 장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의 기초석이 예수님이요, 터가 사도와 선지자들이라면 벽돌 한 장 한 장은 우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는 가치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가치로 변한 돌이 되어야 합니다. 곧 기초석과 터의 DNA를 갖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토록 3년 내내 제자들을 아담의 제자에서 자기의 제자로 삼으시려 애쓰신 것입니다. 무늬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속이 완전히 예수님의 DNA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갈 때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초와 터와 다른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벽돌로 세우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43, 4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초석과 터와 다른 세상의 DNA로 건물이 올라가면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초석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든든한 기반이 되는 동시에 심판의 돌이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의 가치로 완성된 교회입니다. 곧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요한계시록 21 9절∼22절을 보세요.

일곱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911)

바로 이것이 건축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해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 니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214,18)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 이라.. (1920)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223)

성의 핵심은 기초인데 성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열두 사도와 열두 지파로 터가 잡히고 문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시작은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은 돌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위에 역시 십자가의 가치들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궁극적인 완성은 하늘의 가치로 찬란히 빛나는 맑은 정금 같은 교회 공동체로 완성되어 질 것입니다.


그 과정 가운데 자라가는 우리 교회,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땅의 가치를 버리고 하늘의 가치의 작은 돌들로 교회 공동체로 세워질 때 참으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뻐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포도원을 맡기실 것입니다. 아멘.(*)

Wednesday, May 14, 2014

MAY.11.14. LWC 주일강단 : 십자가 위에 세운 가정(엡5:22∼6:4)

십자가 위에 세운 가정
-5:226:4-



사람은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다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노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세상이 다 노랗게 보입니다. 어떤 분은 붉은 색 안경을 쓰고 있어 세상이 온통 붉게 보입니다. 어떤 분은 파란색 안경을 쓰고 있어 다 그 색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안경을 바로 세계관(world view)이라고 부릅니다. 세계관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부터 받은 영향과 환경 그리고 경험들이 이성에 의해 굳어지면서 나름의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되는데 가장 먼저 변화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3:10) 곧 세계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이 갖고 있던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이요,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최근에 안경을 하나 맞추었는데 검사를 해보니 근시로 나타났습니다. 가까운 것은 잘 보이는데 멀리 있는 것을 흐릿하게 보입니다. 평생 안경을 쓰질 않아 안경에 대한 필요성도 못느끼고 조금 저항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나이와 상황을 받아 들이면서 코스코에 가서 안경을 맞쳤습니다. 처음에는 어지럽고 초점도 안맞고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안경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 있는 글씨나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 모릅니다. 밤에 운전할 때도 큰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세상과 삶 그리고 시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렌즈를 더욱 밝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더욱 깊이 배우고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새로운 안경이 더욱 깨끗해지고 밝아져서 맑은 하나님의 눈으로 가까이 자신과 가정의 삶과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렌즈 곧 하나님의 눈을 갖게 되면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는데 거기에는 성경적 세계관의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 원리와 타락 원리와 구원 원리입니다. 성경은 이 세가지 프레임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주제를 놓고 볼 때 이 성경적 프레임을 통과 시켜보면 그 주제에 대한 창조의 원리와 타락의 원리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구원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해석하게 됩니다.

오늘은 바로 이 새로운 성경 렌즈를 통해 가정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가정에 대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복의 가정입니다.

먼저 성경은 창조 원리로서 가정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2 24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조 원리에서 가정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자가 부모를 떠나 시집을 오는 의미도 있지만 창조 원리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아내라는 말은 결혼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여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정관을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성숙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성숙한 여자와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것은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결혼은 인간관계 가운데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몸 뿐 아니라 한 영, 한 마음, 한 생각, 한 방향으로 이제는 둘이 하나 되어 사는 것이 결혼이요, 가정입니다. 최초의 에덴의 가정은 사랑과 평화와 자유만이 넘쳤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시를 지어주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최초의 시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그래서 아내를 보면 시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닮은 자녀를 낳아 기르므로 가장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 가정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라는 각자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남편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가정을 이끕니다. 그것은 곧 말씀 맡은 자로서 영적 제사장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리더십을 남편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자신이 가정의 리더로서 말씀과 사랑과 섬김으로 가정을 세워나가는 것이 창조 원리였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을 돕는 배필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영적 리더로서 가정을 잘 섬기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바로 창조된 가정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곧 복의 근원이요, 복의 통로로 가정제도를 만드사 온 세상에 아름다운 가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나타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 원리에 의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위기의 가정입니다.

이처럼 복된 가정으로 시작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해 가정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어떠한 가정이 되는지 아십니까? 위기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복되고 아름다운 에덴의 가정에 죄가 들어오니 위기의 에덴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국과 낙원이었던 가정이 실낙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에덴의 위기의 가정에 나타난 현실은 무엇이었습니까? 곧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가정에 들어온 타락과 부패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먼저 하나님과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3:8 부부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3:10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3:23 에덴에서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거절감, 쫓겨남(존재론적 상실감)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주므로 (관계의 어려움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과 아내에게 핑계대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모습이 나타나요. 

3:16 아내는 수고로 자식을 낳고 남편을 원하며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게 돼요.(동등함이 깨짐) 남편은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고, 아내는 남편을 소유하려고 해요.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고 이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폭발하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따라 살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3:17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따랐고, 그 결과 땅이 저주를 받고, 평생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3:19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평생 쉼이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원리는 가정을 다음세대에도 위기 가운데 몰아갑니다.

형제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4:6,8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죽이는 살인 죄 (철저한 자기중심적 죄악의 극치)

일부다처와 남을 살인하는 죄까지 시작됩니다.

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는 죄 (일부다처)
4:23 나의 상처와 상함으로 말미암아 남 (소년)죽이는 죄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참으로 복된 창조원리가 충만했던 가정에 죄가 들어오자 일어난 엄청난 일들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부부간의 관계가 깨집니다. 형제지간에 미움과 살인과 시기가 들어옵니다. 세상의 물질과의 관계가 어그러집니다. 비정상적 가정의 위기인데 그것이 마치 정상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가기에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의지 합니다. 서로 함께 삽니다. 곧 창조 원리에 타락원리가 공존하는 위기의 가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바로 이러한 창조의 원리와 타락의 원리가 함께 있음을 직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원리는 살리고 타락의 원리는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3.  회복의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위기의 가정이 다시금 창조시의 복된 가정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돈만 많으면 위기의 가정에서 행복한 가정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돈을 많이 벌어 큰 집을 사 행복할 줄 알았더니 아이들이 각자 자기 방에만 들어가서 나오질 않아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위기가 심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이 있으면 여러 편리함은 있겠지요. 그러나 물질이 가정을 온전히 회복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타락의 원리에서 창조의 원리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 세운 가정이 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것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왜 그렇 습니까? 십자가 있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있는 남편을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있는 아내를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있는 엄마를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있는 자녀들을 생각해 보세요.

타락의 원리가 가정에 적용되면 가정의 남편도 아내도 아이들도 너무나 이기적이 됩니다. 자기 중심적이 됩니다. 무서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원리가 들어오면 이제 위기의 가정에서 회복의 가정으로 변화 되어집니다.

회복의 가정이 되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십니다. 남편과 아내의 타락의 본성으로는 잘된 것은 자기 탓, 못된 것은 아내 탓으로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면 부부의 마음이 변화됩니다. 거꾸로 고백하게 됩니다. 잘된 것은 당신 덕분이고, 잘못 된 것은 나 때문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타락의 원리 가운데 있는 가정이 구원의 원리 가운데 들어오면 십자가의 은혜가 넘쳐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멘토 목사님이셨던 김종수 목사님은 교회에서 나버림의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고 가정에서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주일예배 순서에 가슴을 치며 다 나때문입니다를 훈련 시키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에 두살 박이 아기를 갖은 젊은 부부가 싸우기 시작 했습니다. 너 때문이라고 서로 소리쳤습니다. 타락의 원리가 가득찼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 참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두살 박이 아기가 엄마를 쳐다보며 엄마 나땜”, 또 아빠를 쳐다보고 아빠 나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간 부부가 멈추고 아이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기가 엄마 나땜, 아빠 나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빠와 엄마의 마음에 십자가의 은혜가 흘러 들어왔습니다. 서로 아기를 부둥켜 앉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기가 교회 유아실에서 늘 예배시간에 어른들이 했던 다 나 때문입니다나 땜이라고 한 것입니다부부는 서로 울며 자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고 순간 가정은 천국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 때문이야 하면 지옥이 되고, 나 때문이야 하면 놀랍게도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 세운 가정입니다. 타락의 원리가 엄습할 때 그래서 가정에서 큰 소리가 나고 서로 다툴 때 구원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로 타락의 원리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에 타락의 쓴뿌리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죄의 누룩이 퍼지지 못하도록 서로 기도하며 회개하며 십자가 사랑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 위에 세운 가정, 구원의 원리로 회복된 가정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라고 하셨습니다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하심같이 아내를 생명다해 사랑하고 보호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 원리를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31절에서 창2:24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이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에 구원의 원리 곧 십자가가 더해져서 타락의 원리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원리로서 부모와 자녀의 회복된 가정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아비를 말씀하시면서 각각에게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삶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내는 복종, 남편은 사랑, 자녀는 순종, 아비는 양육입니다. 바탕은 십자가의 예수님의 마음이요, 그 위에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종과 사랑과 순종과 양육은 모든 십자가의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여기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 복종휘포 + 타쏘의 합성어인데 휘포∼에 의하여, 을 통하여, 을 인하여란 의미이고 타쏘정돈하다, 정리하다, 결정하다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말씀은 가정의 대소사를 아내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고 남편의 결정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묻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하와가 남편에게 물었어야 해요. 그런데 자신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타락 원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지혜있는 아내는 남편이 가정의 가장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뜻이 있더라도 남편의 뜻이 결정되어지는데 맞추고 남편이 그렇게 합력하여 결정하며 나아가도록 기다리며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의 가정 리더십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내가 현숙하고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교회가 머리되신 예수님의 뜻을 구하듯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권력으로 군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과 더불어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비들은 양육입니다. 아비들이 여기서 많이 실패합니다. 경제적 문제만 서포트 해주면 아버지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락의 원리입니다. 구원의 원리는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아버지들이 이 양육의 의무를 아내에게 넘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비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비가 하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의 주체는 가정이 되고 교회는 그것을 서포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하려는 것이 이처럼 구원의 원리로 가정을 바르게 세워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학교가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빼았았습니다. 이것을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아버지들이 삼대를 양육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식탁 가정 예배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양육에서 중요한 것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입니다. 아버지의 절제 못한 감정의 권위로 자녀를 대할 때 자녀의 마음에는 분노가 쌓입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지고 양육이 실패해요. 그러므로 아비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십자가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비가 먼저 주의 교훈과 훈계를 배워야만 합니다. 자신이 모르면서 어떻게 양육합니까?

그래서 말씀 읽는 아버지, 말씀 배우고 지켜 행하는 아버지가 먼저 되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가정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말씀을 읽고 무릎 꿇는 아버지가 가장 아름다운 아버지인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 모든 가정마다 창조와 구원의 원리로 타락의 원리를 물리치는 역사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한 가정 한 가정이 다시금 십자가 위에 세운 가정이 되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더욱 사랑스러워지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 이웃에게 흘러넘쳐 위기의 가정들이 여러분의 가정을 보고 주님께 돌아와 회복되는 사명의 열매와 감격들이 넘쳐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