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29, 2014

APR. 27. LWC 주일설교 : 선포 된 십자가 (눅24:36∼53)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예고 된 십자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두번째는 그 예고대로 예수님에 의해 역사 속에서 「실현 된 십자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세번째로 오직 부활을 통해 「완성 된 십자가」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가 완성 된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신 부활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소식이요, 복음입니다. 그러면 기쁜 소식인 이 복음은 어떻게 되어 야만 합니까?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증거 되어야만 합니다. 알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완성 된 십자가」는 이제 복음이 되어 「선포 된 십자가」로 나아 갑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흐름을 보면 부활로 완성된 십자가가 부활 이후부터는 선포된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예고 된 십자가와 실현 된 십자가 그리고 완성 된 십자가가 창세기부터 4복음서 까지라면 사도행전 부터는 선포 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완성된 십자가가 복음으로 증거되는 「선포 된 십자가」에 대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선포된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십자가가 알려지는데 바로 누군가의 선포를 통해서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 2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나님의 지혜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 주시는데 무엇을 통해 하신다고 하세요? 바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전도라는 말이 헬라어로 케리그마(kerugma) 라는 단어입니다. 케리그마는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선포’(proclamation), ‘설교(preaching)를 의미합니다. 곧 선포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도로 우리 성경이 번역한 것입니다.

이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라고 했어요. 여기서 전하니가 케리그마의 동사형입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이 세상을 대표하는 표적을 구하고 유대인과 지혜를 찾는 헬라인과 완전히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포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에 친히 선포하는 미련한 방법을 통해 영원한 구원의 지혜를 나타내시는데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는 케리그마선포와 설교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케리그마에 믿음으로 화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면하고 거부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 「선포 된 십자가」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 먼저 누가 선포하라고 하셨습니까?

36절을 보세요.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 니다. 주님이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리시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하십니까? 제자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무서워 영인 줄 알았 다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를 만져보라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리고 손과 발을 보이셔요. 제자들이 너무 기쁘면서도 놀라서 아직 믿지 못하자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없느냐? 라고 하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 을 받아 잡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말씀이셨던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때문에 살과 뼈가 있는 육신을 부활체로 여전히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존재방식을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오실 때 부활하는데 영이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몸이예요. 성경은 신령한 몸이요, 영화로운 몸이라고 했어요. 지금의 몸은 수명이 백 년이 채 안돼요. 그런데 영화로운 몸 곧 부활한 신령한 몸은 그 수명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 기능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상상할 수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도 있고, 뼈도 있고, 구운 생선도 먹어요.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와 부활 곧 복음을 통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선포하라고 지금 제자들에게 친히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2. 무엇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곧 케리그마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선포와 설교와 전도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바로 성경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회개 이 네 가지 입니다.
먼저 성경을 선포하고 설교하고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44절을 보세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나를 가르켜 기록된 모든 것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다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곧 복음입니다. 46절을 보세요.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

그리고 회개입니다. 47절을 보세요.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그러므로 케리그마선포와 설교 그리고 전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그리스도를 가르켜 기록된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회개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이 케리그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케리그마가 온전히 증거될 때 구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 님이 원하시는 사명인 것입니다.  


   3. 선포의 대상은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47절 하반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성경과 십자가와 부활과 회개의 케리그마를 들어야 할 대상은 바로 이 땅의 모든 족속 입니다.  그들에게 전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이나 약속 하셨어요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2:3  땅의 모든 족속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18:18천하 만민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것이 아니냐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12:3과 창18:18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이 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에게 임할 것을 말씀하셔요. 여기서 는 문맥상 둘 다 아브라함이예요. 그런데 창세기 2218절에는 좀 달라요. “네 씨라고 하셨어요. 왜 여기서는 네 씨라고 하십니까? 곧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는 사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삭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숫양도 예수님을 상징하는 바로 이 상징을 말씀하신 후에 네 씨로 말미암아”,”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시잖아요. 여기서 네 씨가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네 씨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모든 족속에게 선포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구원을 얻어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라고 하신 곳이 바로 모리아 산인데 후에 이 곳이 예루살렘 성전터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때부터 하나님은 모리아산 곧 예루살렘에서 부터 모든 족속에게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선포된 십자가를 통해 온 세상에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복이 천하 만민에게 임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를 통해, 설교를 통해, 전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이천년 동안 일어난 구원 역사이고, 재림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이 케리그마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선포해야 할 자는 누구입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선포의 사명을 가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누가 성경과 십자가와 부활과 회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48절을 보세요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여기서 너희가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직접 「예고 된 십자가」가 「실현 된 십자가」가 되고 부활을 통해 「완성 된 십자가」를 본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 「선포 된 십자가」에 대해 듣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의 증인이라고 하시나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회개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선포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누굽니까?

바로 제자들이 보고 믿었던 성경대로 모든 구원의 역사가 우리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 성경 말씀대로 선포된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회개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옆에 분하고 인사하세요. “축하합니다. 복 받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가 아니라 우리가 바로 이 모든 일의 증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포 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었고, 이제는 우리가 이어 모든 족속에게 십자가와 부활과 회개를 선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파송장면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1b)고 하십니다. 이 부분이 복음서의 클라이막스와 같아요. 왜냐하면 예수님 제자훈련의 재생산의 절정이요,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방황하고 혼돈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온전히 잡아 주시기 때문 입니다.

여기에 바로 십자가와 부활절을 지낸 우리의 방향이 있습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절기로 기념하고 그냥 끝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간에 바로 이 자리에 오셔서 말씀하신 다면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 이후의 모든 성도, 모든 교회는 바로 이 보내심을 받아 선포하고 증인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5. 선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세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여기서 마음이 열어는 마음을 완전히 오픈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남에게 선포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도 내 마음을 여셔서 말씀이 깨달아지는 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49절을 보세요. 선포의 사명을 받은 자들이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 선포의 내용과 선포의 행위 곧 케리그마의 사명이 우리의 사명인 것은 분명한데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분명하게 이 성에 머물러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약속하는 성령이십니다.

?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성령이 오셔서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 주시기 전에는 이 사명을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는 지식과 열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 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 보세요.

그러면 복음을 선포하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성령입니다. 예수님 께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신 바로 그 심령에 성령의 능력 곧 불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이 폭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열리고 깨달아진 말씀 위에 성령의 불이 내려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모든 족속 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와 부활이 선포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행전이요, 사도행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바로 우리교회가 이렇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결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늘 읽으며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5월부터 창세기를 시작으로 읽어 나갈 때 마음을 활짝 열고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말씀 위에 위로 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능력, 성령의 불을 부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위로 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바로 그 깨달은 말씀 위에 성령의 불이 붙으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처럼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말씀이 폭발하는 주님의 교회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언제까지 선포해야 합니까? 51절을 보세요.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예수님의 승천 장면입니다. 「선포 된 십자가」의 케리그마의 사명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이 선포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까?

사도행전 1 11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때까지, 곧 재림의 날까지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회개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날까지 우리 LWC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어 「선포 된 십자가」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역사가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Wednesday, April 23, 2014

APR. 20. LWC 주일설교 : 완성 된 십자가 (눅24:1∼17)



지난 한 주간 고난 주간은 예전의 고난 주간과는 좀 달랐습니다. 물론 새벽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행적을 따라가며 묵상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국에서 어린 학생들이 당한 아픔과 가족들의 절규를 듣고 보는 것이 참으로 참담한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바다같은 어른들의 욕심과 죄악이 우리 자녀들을 차가운 바닷 속에 잠기게 한 것 같아 너무나도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생명보다 귀한 아이들을 잃고 탄식하다 못해 혼절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자기 아들에게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쏟아 부으셔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슬픔에 빠져있는 분들을 위로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이 얼마나 소망이 되고, 부활이 얼마나 위로가 되며, 부활 만이 인간의 모든 아픔과 좌절과 탄식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은혜임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이 시간도 배 안에 살아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있다면 반드시 살아 나오는 주님의 은혜와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고 된 십자가」와 「실현 된 십자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다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지만 완성되어야만 합니다. 실현은 성경에 예고된 십자가가 예수님을 통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완성은 그 예고와 실현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완성 되어야만 합니다. 「완성 된 십자가」 는 십자가가 말 그대로 온전한 십자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가 진정한 십자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사역이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난다면 온전해 질 수가 없습 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십자가가 온전해 질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만이 십자가가 진정한 십자가가 되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이 십자 가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그러면 우리 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요, 우리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은 망한 자라고까지 했어요. 왜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419)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대속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을 통해 십자가가 완성이 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증거하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은 두 가지를 예고 하셨습니다.

6절을 보세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천사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에게 이미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무엇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부활할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갈릴리에서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중에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한다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한 고백을 기억하시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세요. 정확한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하십니다. 곧 신앙고백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되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로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나타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16:21) 예수님께서 드디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또한 마17:22절에 보면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예고 입니다. (9:30-32,9:43-45) 바로 이 말씀이 천사가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20:17-19절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는 길에 열 두 제자에게 따로 말씀하세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10:32-43; 18:31-34)

이것이 세번째 예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세 번씩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예고 하셨는데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 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라는 신앙고백 다음부터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인 자신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의 미래 모습을 오해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려고 해요. 그러면 그 신앙고백과 다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심으로 진정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대속하고, 다시 사는 다른 차원의 구원을 몸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입니다.

무덤에 찾아 온 여인들에게 천사는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이 여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했습니다.(24:8)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부활을 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반응을 11절에서 보세요.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예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직접 세 번이나 들은 제자들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이 인간의 상식과 차원을 뛰어넘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보기는 보았는데 그 의미도 몰랐고, 더욱이 부활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 그룹 가운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있었는데 사두개인은 영도 부활도 안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둘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겠다고 하면 그것은 사실 십자가도 못 믿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와 부활을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한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 번이나 고난을 예고 하실 때 십자가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와 삼일 후에 부활할 것을 함께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로 말씀하셔요?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는 그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한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활 하셨기에 십자가의 구원이 온전해지고, 완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됨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삶에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3.   고난 이후에 영광이 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못했던 자들에게 좀더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십니다. 26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 을 받고 자기의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고난과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는 고난이요, 부활은 영광이라고 해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뿌리요, 하나임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면서 순서까지 분명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 보다는 영광을 좋아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고난을 좋아하고 영광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부활의 영광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우리의 생각과 달라요. 아니 우리 생각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을 보세요. 얼마나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작은 영광에도 그저 높아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부정하시고, 자기를 죽이시는 것을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시므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도 먼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4)

사실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여도 얼마나 받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 미국에 살면서 복음으로 인해 받은 고난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기꺼이 성도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교회와 성도를 위한 자기 부정이요, 자기 희생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3:10-12)

그는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려 했고,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영광을 맛보려고 애썼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푯대라고 했어요. 그 부활의 영광의 푯대를 향해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부활의 결과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임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부활의 한 없는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가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4.  십자가와 부활이 믿음으로 하나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여인들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실의에 빠져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 이들과 약 7마일 정도를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때 두 제자는 어찌 최근에 예루살렘 있었던 일을 당신만 홀로 모르냐고 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5,26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들을 보세요.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고 많은 분들이 또 한사람은 바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당시 상황을 보세요. 본인들의 입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슬픈 빛을 띄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내 입으로 말하는데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를 책망하셨어요. 하나는 미련하다고 하셨고, 하나는 성경을 더디 믿고 있다고 질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글로바는 잘 몰라도 누가는 잘 알아요. 누가는 당시에 의사였습니다. 전문인입니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련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원뜻은 어리석다’, ‘이해하지 못한다’, ‘센스가 없다이런 의미입니다. 두 사람이 세상에서는 똑똑한지 몰라도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며, 믿는 데는 어리석고 더뎠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서 결코 말씀이 살아 역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 지식과 믿음으로 받아 들임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는 말하는데 내가 어리석고 내가 믿음이 더디면 전혀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떠나지 않으세요. 7마일을 거의 동행하세요. 왜 동행 하십니까?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세요.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동행하는 내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성경에서 자기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동행의 목적이셨어요. 몇 시간 내내 성경을 풀어 주셨어요.

그리고 그들을 떠나 가시고 그들이 예수님인 줄 깨달았을 때 어떻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32절을 보세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기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성경을 온전하게 열어(설명) 주실 때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뜨겁다는 말은 카이오메네란 말인데 수동태, 현재 분사로 계속해서 불타 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우리가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십자가도 목격했고, 부활의 소식도 들었던 자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다 보고 들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냉냉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 습니다. 믿음이 더뎠다고 했습니다. 의미도 몰랐고, 이해도 못했으며, 믿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불이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잠깐 붙고 만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스스로 뜨겁게 된 것이 아닙니다. 수동태예요. 누군가에 의해 뜨거워진 것입니다. 마치 마른 장작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33절 이하를 보세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 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성경이 온전히 열리고,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확증을 받았기 때문에 불이 붙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이예요. 그 결과가 어떠해요? 곧 그 때로 일어나돌아가 보니 자기들의 목적과 스케줄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예루 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불타면서 더 이상 엠마오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의 목적과 스케줄이 그들을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그들을 이끌어 갑니다. 마음의 뜨거운 불이 그들을 인도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심령에 불이 붙으면 인생의 진로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 처럼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말씀을 자세히 배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확신 하게 될 때 마음에 성령의 불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성경이 열리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뜨겁게 성령으로 불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감사하게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풀어 가르칠 때 이렇게 불타는 역사를 은혜로 보게 하셨습니다. 종은 제자훈련이 예수님이 하신대로 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세히 성경을 가르치면 십자가와 부활의 불이 마음 속에서 뜨겁게 활활 타올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오순절을 통과해야 합니다. 위로 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부활은 생명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이고, 부활을 통해 우리가 다시 살 것을 첫 열매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시작이라면 부활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주신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 거룩한 아침에 부활을 통해 「완성 된 십자가」의 불이 저와 여러분 속과, 우리 공동체 안에 활활 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Monday, April 14, 2014

APR. 13. LWC 주일설교 : 실현 된 십자가 (요19:17∼30)


오늘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와 유대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도시인 예루살렘에는 아마도 유대 전통에 의해 매년 절기마다 방문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몇 차례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500여년 전에 사역했던 스가랴 선지자는 (B.C.520,9:9)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9:9)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크게 기뻐하라”, “즐거이 부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왕이 너희에게 임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크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왕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당시 황제들하고 좀 다릅니다.  

당시 로마 황제들의 입성은 화려함과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황제가 나귀 새끼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힘있고 잘생긴 백마를 타고, 군대의 호위 속에서 나팔소리와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많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하하하하고 비웃을 모습이요, 나귀 새끼를 탔다고 조롱 받을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가랴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고 예언을 하였고,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그대로 하셨습니다. 나귀새끼를 구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19:31) 

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와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입성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왕께서 군림하러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러 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황제의 입성식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자신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순간이 다가 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셔서 왕이 되시 면 서로 좌우정, 우의정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소위 3년을 예수님께 직접 제자훈련 받은 자들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주간의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 그렇습니까? 여전히 세상적 원리, 세상적 가치를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고 된 십자가」를 「실현 된 십자가」로 이루시고자 들어가시는 것이예요. 오늘은 지난 주의 예고 된 십자가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증거하겠습니다.

  

   1.   자기를 온전히 맡기신 예수님

17절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여기보면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16절에 보면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고 했습니다. 곧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예수님을 맡은 자들은 소위 사탄의 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탄에게 완전히 넘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3:15) 그 예언이 실현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맡은 사탄의 무리들을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는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들을 따르는 군중들, 그리고 로마의 장교들과 군병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고, 얼굴에 침을 밷고, 얼굴을 쳤다고 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다 취하여 제비뽑아 가졌습니다. 군중들은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는 예언대로 벌레요,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그 때 어디 있었는가?’ 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찬송가에도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종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습니다. 그를 죽이라고 소리지르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면 교회에서 종교 생활만 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조롱과 비방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냐구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조롱하고, 비방할 때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 가의 예수님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조롱하고, 비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을 보지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알지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탄의 회에 완전히 넘기십니까? 바로 그들의 죄를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들의 죄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예수님을 자기들 방식대로 재단(裁斷)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를 흔들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모욕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15:29)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그들에게 완전히 맡기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누가 자신의 대적에게 자기의 생명을 맡기겠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자신을 맡기심으로 오히려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역설적 십자가를 실현하셨습니다. 곧 십자가로 오히려 그들이 살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실현 된 십자가는 자신의 대적에게 자신을 맡기심으로 그들에게 오히려 살 길을 가르치시는 용서의 십자가요, 은혜의 십자가요, 파라독스의 십자가 입니다. 이 십자가의 깊은 은혜가 고난주간 내내 저와 여러분 안에 넘쳐나길 소원 합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요한복음 19 17절을 다시 보세요.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구절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자기의 십자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진정한 제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고 반복하여 소화하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 모두 자신이 져야할 자기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 가운데 십자가가 있기는 있는데 목걸이에, 자동차에, 반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차에 달고 다닙니다. 집안 벽에도 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상징물로는 많이 소유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의 십자가에 대한 묵상과 삶에 치열한 고민이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나가서 여기서 자기 십자가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경우 자기 십자가하면 속썩이는 남편, 비뚤어진 아이들, 힘든 일, 문제 이런 것들로 생각합니다. 만약 자기 십자가를 그렇게만 받아 들이면 그의 삶은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 니다. 결국에는 너무나 이기적인, 자기 문제에만 매몰되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기가 막힌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 십자가입니다. 오해된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잘 살펴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자기 십자가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입니까? 아니예요. 그러면 누구의 십자가 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십자가예요.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였어요. 그런데 누가 지십니까? 예수님이 지세요.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정확히 말씀 드리면 예수님은 남의 십자가자기 십자가로 지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남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형통하고, 잘 되고, 아프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고이런 것에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뚜렷합니다. 흐릿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지 않고는 도저히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이처럼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곧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슬픔,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철저히 받아 들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십자가를 자기의 십자가로 지고 묵묵히 해골이라는 골고다로 올라 가셨습니다. 곧 저와 여러분의 남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시는 자기 부정의 최절정을 「실현 된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

19, 20절을 보세요.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사실 빌라도는 정치적인 인물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서 패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이 쓸 것을 썼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후 가장 먼저 끌려 간 곳이 당시 대제사장의 장인 안나스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가서 심문을 당하십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대제사장 그룹이 예수님을 먼저 잡고 심문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잡은 이유는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보낸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저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빌라도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질문이예요. 그 때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되 물으십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유대인이냐?고 하면서 예수님께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심문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세요. 36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을 보세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빌라도와 유대교 그룹의 대화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종교적, 민족적인 그들만의 리그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은 아예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조차 인정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이단의 교주로 여기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 가운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고,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36,37) 

, 여기 진리와 비진리가 부딪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님이고 비진리는 빌라도와 유대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비진리가 파워가 있는 것 같아요. 비진리가 힘이 있어요. 그리고 당시에 서로 싸우던 빌라도와 유대교가 힘을 합쳐요. 비진리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진리를 대항하는 것입니다.(2)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해요. 비진리는 이처럼 파워가 있어요.

그런데 진리는 고난과 조롱을 받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힘있는 파워 편에 섭니다. “진리냐? 비진리냐?”가 아니라 힘이 있냐? 없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다르게 말하면 진리냐? 비진리냐가 아니라 돈이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는 세상의 파워와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요.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열리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현 된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완전히 담당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진정한 왕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오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진정한 왕으로 고백하는 자만이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진리에 속한 자 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진리, 오직 예수에 속한 자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주님과의 심문을 끝났고 빌라도는 단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패를 달고 말았 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현장에 있던 어느 로마 백부장은 무엇이라 고백하는지 아세요?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더라 라고 고백을 해요. 진리에 속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와 아닌 자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오직 영의 귀가 열려 진리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4.  다 이루신 예수님

3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7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운명하시기 직전 마지막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는 이 마지막 말씀이야 말로 구약에 수 없이 예고 되었던 십자가가 온전히 실현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의 영광을 함께 나누신 예고된 그 모든 계획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사명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원뜻이 완불했다”, “다 갚았다는 당시의 상업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곧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생명을 주심으로 다 값으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이 세상에서 누가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자기 생명을 대신 내어 줌으로 갚아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값치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곧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십자가를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이요, 자기 중심입니다. 그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생명도, 내 시간도, 내 물질도, 내 건강도 다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님의 것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과 십자가 이후의 삶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다름의 은혜가 매일의 삶에서 넘쳐 흐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