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29, 2014

AUG. 24. 14. 주일강단 : 욥의 신앙을 따라 삽시다!




욥의 신앙을 따라 삽시다!
 
1:15
 
 
 
  
 
지난 주 가족과 함께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1600만명을 넘어선 명량을 보았습니다. 이국 만리 미국 땅에서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니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어린 시절 떠나왔지만 영화를 보고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안위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내놓고 싸우는 리더와 그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백성의 하나된 마음이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진 나라를 건져내 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이렇게 살게 만든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삶 그 자체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들이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택하라면 이순신 장군을 택할 것입니다. 못보신 분들은 가족들, 특히 자녀들과 함께 꼭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조국이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 우리에게 거저 삶의 터전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앞선 누군가의 생명과 헌신의 값으로 오늘 우리가 이처럼 자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고, 우리 또한 후대에게 보다 낳은 가치의 삶을 물려주는 사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 놓으신 예수님 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롤모델로 선택하실 자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일 것입니다. 지난 번에 다윗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또 다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소개하기 원합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욥은 성경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직접적인 언약의 후손 이란 근거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욥이 살던 시대를 족장 특히 야곱시대로 보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던 고향을 북 아라비아, 에돔지역으로 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백성을 부르시지만 하나님의 주권하에 보다 폭넓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욥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의 시대의 구원 문제를 논의할 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욥을 살펴봄으로 저와 여러분도 욥의 신앙을 따라 사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욥이 우리가 본받아야할 롤모델이 될까요? 그의 신앙과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욥의 삶의 네가지 특징
 
 
먼저 욥의 삶에는 네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이전에 욥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1:8b장과 욥2:3b에서하나님께서는 욥과 같은 자가 세상에 없다고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를 다 알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욥과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욥을 그렇게 인정하실까요? 하나님은 욥의 네 가지를 주의하여 보셨습니다. 1:1을 보세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더라
 
 
(1) 온전함 (blameless)
 
욥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평가는 그가 온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타밈이라는 단어인데 예전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말씀을 드릴 때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도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17:1)고 요구하셨습니다. 모세를 통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너는 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18:13)고 하셨습니다. 특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삼하22 24절에 보면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로 완전으로 번역된 단어가 동일한 타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도 온전하다는 타밈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욥이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동일한 죄인입니다.
 
6:24을 보세요.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7:21을 보세요.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 시니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 하리이다.
 
앞에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하면 자신이 더이상 변명하지 않고 잠잠하겠다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하나님께 왜 자신의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죄악을 제거해 주시지 않으시냐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앞의 허물과 뒤의 허물이 우리 말로는 번역이 같은 단어로 되었지만 원어는 다릅니다. 앞의 허물은 솨가라는 말인데 길을 잃다, 빗나가다, 실수하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뒤의 허물은 페솨라는 말로 위반, 범죄곧 법을 어긴 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의 허물은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 친구들이 네가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주장을 하는데 욥은 자신이 그럴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상대적인 허물, 특정된 허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구절의 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죄, 인간의 범법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욥이 온전하다고 하시는 것은 욥이 죄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욥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흠이 없는 존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죄인임을 늘 고백하면서도 삶 속에서 진실하고 흠없이 살고자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온전한 삶입니다.
 
 
(2) 정직함 (upright)
 
하나님의 욥에 대한 두번째 평가는 정직함입니다. 이 말은 야솨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이곧다, 옳바르다, 의롭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어원을 보면 마음에 들다, 합치하다이런 의미가 있어요. 곧 욥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 적으로, 윤리적으로 옳고, 바른 삶을 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 정직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옳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면 삶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의롭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다고 하면서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속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함 (feared God)
 
욥에 대한 하나님의 세번째 평가를 보세요.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경외라는 말이야레란 말인데 기본어가두려워하다’,‘무서워하다의 의미 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 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막연한 무서움,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된 우리가 겸손함으로 무릎꿇음이요, 하나 님의 주권에 대한 존경과 위엄 앞에 서는 태도입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훌륭하고 부귀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적신으로 보내시고 적신으로 데려가시는 분 곧 절대 주권자임을 알고 그 분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경외한 것입니다.   
 
욥이 28:2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하는 함이 지혜요.
 
여러분!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수고 하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12:13,14) 
 
욥은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는 나를 경외하는 자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세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여러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4) 악에서 떠남 (shunned evil)
 
여기서 의 원뜻은 로아라는 말에서 왔는데 나쁜이란 의미로 도덕적인 악, 윤리적인 죄와 악을 말합니다. 욥은 28:28b에서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떠났다는 말은쑤르라는 말인데얼굴을 외면하 다 ’,‘떠나다’,‘돌이키다이런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 하시는 근거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욥 스스로가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는 것을 알았고, 고백하고, 노력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가치관을, 가치관은 감정을, 감정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생각덩어리 자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온전히 바뀐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하나님이 욥의 인생을 평가하실 때 이 네 가지 온전하다, 정직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다, 악에서 떠났다가 그의 인생의 대표적인 모습이 된것입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1에 이어서 1:8절과 2:3절을 보세요. 동일하게 욥에 대해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십니다. 동일한 평가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욥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 또한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자입니다.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욥처럼 더욱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늘 살아가려고 애씀으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존귀한 여러분 한 분 한 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초지일관한 욥의 행위
 
놀랍게도 성경은 욥의 삶의 이 네가지 특징이 하나의 어떤 특별한 행위로 지속적으로 패턴화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b을 보세요.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무엇이 어떠 하였길래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다고 하실까요?
 
욥에게는 아내와 아들 일곱, 딸 셋 곧 10남매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유는 양 7,000마리 낙타 3,000마리 소500겨리 암나귀 500 마리와 종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동방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복과 관련해 그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장성한 욥의 아들들은 각자의 집이 있었고, 그들은 각자의 생일이 되면 형제와 자매들을 초대하여 1년 내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자녀들이 잔치를 끝내면 늘 똑같은 행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잔치가 끝나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 님께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각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 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의 말을 들어 보세요.(5b)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여기 보세요.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욥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아들들이 더욱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더욱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가 자녀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번제는 그의 아들들을 대신해 동물을 완전히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동물을 왜 태워 죽입니까? 번제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데 동물이 대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욥은 그의 아들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인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 죄성이 잔치 속에서 먹고 마시며 흥분할 때 쉽게 나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들들의 숫자대로 번제를 드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늘 바른 관계 속에 있기를 소원하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우리 자녀를 잘 키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잘 키운다는 것이 단지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이 뒤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아니 절대순위입니다. 이번 여름에 저의 아이들과 며칠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아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피지컬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제법 근육이 솟아났고 매일 밤마다 저를 데리고 트레이닝을 시켰습니다. 함께 하니 좋았습니다. 며칠동안 아들을 통해 훈련을 받은 후에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의 피지컬 코치가 되어 좋다. 그렇게 해라. 나도 너의 스피리철 코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좋다고 웃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대학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실력을 쌓으며 영적 고민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벽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해 간구할 때 이 아이의 이름도 부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새벽마다 이 아이를 위해 무릎꿇을 수는 있습니다.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부모의 사명이요, 복입니다. 
 
욥을 본받아 이제 식탁가정예배를 잘 드리십시오. 출타한 자녀가 있는 가정은 두 부부가 식탁가정예배에서 자녀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주일 저녁에 한 번 식탁에 둘러앉아 부부가 예배하십시오. 하나님앞에서 자녀의 이름을 올려드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십시오. 이 복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게의 행위가 늘 이러하 였다라고 인정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까지 네가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며 그런 자가 세상에 없다고  자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까지 자랑하는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 보실 때 참으로 욥처럼 사탄에게 네가 메릴랜드의 말씀의 교회 000 성도를 보았느냐?’라고, ‘더 나아가 네가 말씀으로 사는 교회를 보았느냐?’ 라고 자랑하실 수 있는 성도, 가정,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Thursday, August 21, 2014

AUG. 17. 14. 주일강단 : 너는 복이 될지라!


너는 복이 될지라


-12:19 -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네 번이나 반복되어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입니다.(2a,2b,3a,3b)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얼마나 복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음식을 먹는데 사용하는 수저에도 한자로 복 자를 새겨 놓습니다. 아마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복이 되라는 것 같습니다. 베개닢에도 복 자를 새겨 놓습니다. 침상에 누워 잘때도 복이 들어오길 원하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대문에도 복자를 크게 붙여 놓습니다. 이처럼 동양 유교사상에서 말하는 복을 흔히 오복(五福)이라 합니다. 오복(五福)이란 말은 중국 고대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에 기록 되어 있는데 옛 사람들이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정의해 놓은 것입니다오복(五福)은 수(), (),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는 장수의 복입니다. ()는 물질과 재산의 복입니다. 강녕(康寧)은 몸과 마음의 건강의 복을 말합니다. 유호덕(攸好德)은 덕을 행하며 즐겨 행하는 복을 말합니다. 고종명(考終命)은 제명대로 살다가 죽는 복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성경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이 세상이 말하는 복과 좀 다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복이라는 단어는 베라카라는 말인데 축복의 근원’, ‘선물이란 의미입니다세상의 복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요, 사람이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 관계가 맺어지면서 사람 자체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는 복이 될지라"(12:2)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 스스로 복이 될 수 있습니까?

베라카라는 단어의 어원은 바라크라는 말인데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입니다. 곧 성경의 복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자가 바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재물만 많으면 복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사람이면 그는 여전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복은 물질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이 된 사람은 더 나아가 모든 삶에서 복을 나누어 주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처럼 귀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은 오래 살아야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사명대로 살아야 복이라 하십니다. 세상은 물질이 많아야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정직하게 벌고 베풀고 나누는 삶이 복이라 하십니다. 세상은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거듭한 생명이 복 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영생을 누리며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놀랍게도 이처럼 복을 주시고,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예요.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 하신 것이예요.

3b를 보세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흘러 우리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단지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여기에는 복이 될것이라는 약속에 합당한 삶이 따를 때에 비로소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귀한 약속의 복이 우리 삶 속에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저와 여러분이 복이 될 수 있습니까?

 
1.  말씀을 따라 가는 삶을 살라.

12:13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 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에게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그에게자손’,‘명예’,‘보호복의통로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4절을 보세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여기 보세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고 했습니다. 곧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합니까?

먼저 떠나는 것입니다.(1) 무엇을 떠납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 곧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삶, 아버지 데라가 달의 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겼던 그집, 그 삶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던 삶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따라가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11:8을 보세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보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바로 우리가 읽는 창세기 12:13절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의 태도는 한마디로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은 어느 때 하는 것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곧 앞이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니, 가라 하시니 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b)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 가는 삶은 하나님 없이 살던 세상의 삶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새 비전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십니다. 75세까지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곧 하나님 없는 우상 섬기는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에게 나타나셔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 니다. 내가 새롭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75세까지의 가치관과 삶에 형성된 모든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은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 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따라 가십니까? 돈을 따라 가십니까? 세상의 향락을 따라 가십니까? 아니면 자기 생각을 따라 가십니까? 자기 욕심을 따라 가십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복이 되는 비결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자신이 보기에 바르다는 신념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길의 결국은 패망이라고 했습니다.(14:12)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길을 이러한 길을 떠나 새로운 말씀의 길, 순종의 길, 비전의 길을 걸어 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날마다 넘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복이 된 두번째 이유는 그가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진정한 예배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2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말씀을 따라가 도착을 하였 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7b을 보세요.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마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세요.

②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세겜 땅에서 벧엘 동쪽 산으로 이사한 후에도 제일 먼저 한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었습니다.  

13 4절에 보면 애굽에 내려갔다 다시 올라 온 아브라함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곧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13 18절을 보세요.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기 보세요. 네 번이나 아브라함이 이사할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이것은 꼭 이사할 때만 제단을 쌓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철저한 예배자였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예배드리지 않는 자는 이사해서도 예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많은 성도들의 이사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음에 남는 이사예배가 하나 있습니다. 젊은 부부인데 집을 사서 이사한다며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알았 다고 하고 갔더니 집안이 썰렁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사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내일 이사짐이 들어온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사짐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많은 경우 좋은 가구, 좋은 물건을 들여놓고, 다 정리된 후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데 이 젊은 부부는 달랐습니다. 제 마음이 이상하게 기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을 보세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결국 말씀을 따라 가는 삶은 예배 드리는 삶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외하고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가정은 말씀의 길, 예배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하면 예배도 나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드리기가 쉽습니다. 13 18절에서 아브라함은 예배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나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높이고, 그 분만 경배하며, 그 분의 이름만 부르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 가지 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갔기 때문이요, 날마다 예배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3.  복을 버리는 길로 가지 말라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부정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반면교사의 인물입니다.

12:4절을 보세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무엇이라고 하셨어요? 롯도 그와 함께 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롯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처음에는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과 같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생애를 보면 성경이 이상하리 만큼 자세히 포인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아브라함 공동체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소유가 많아 더 이상 동거할 수 없어 이제 "나를 떠나가라"고 했을 때 롯은 어떻게 합니까?

13:10을 보세요.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기서부터 롯은 아브라함과 정반대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피상적인 겉모습입니다. 에덴과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 곳에 가면 더 벌고, 더 잘 살고, 더 행복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지금 롯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이제까지 따랐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오히려 떠났던 세상의 눈, 세상의 가치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았다고 했는데 그가 든 눈, 그의 안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눈은 유황불과 지진으로 멸망시키실 수 밖에 없는 심판 직전의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롯의 눈에는 멸망할 세상의 성공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13:11을 보세요.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드디어 롯이 결정을 합니다. ‘택하고, 옮기니, 떠난지라고 했습니다.

13:12b를 보세요. 롯은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이 눈을 들어 보고, 결정을 한 후, 계속 이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의 도시 소돔에 도착합니다.

19:1을 보세요.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아브라함처럼 롯이 이사한 사건을 계속 기록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점은 그 어디에도 성경은 롯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자는 예배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따라가는 자는 결코 예배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롯은 멸망할 세상과 그 세상이 번뜩 보여주는 선악과에 취해 꿈의 도시 소돔에 가서 유력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민자가 와서 성공을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롯이 세상의 것을 따라가는 내내 하나님께서 네가 복이 될 것이라는 아브라함 공동체에 주셨던 약속과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비처럼 쏟아질 때 그는 가까스로 탈출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마지막 때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하라는 므네모뉴오’ 라는 말은 '마음에 불러일으키다'란 뜻으로 단순히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곧 지금 우리 시대에 롯의 처, 곧 사건을 마음에 불러 일으켜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교회에게 주신 새로운 비전, 새로운 기회를 따라 말씀을 따라 가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매 주일마다 식탁가정예배의 등불이 환하게 밝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하는 여러분의 가정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복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남에게 복을 주는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롯의 길을 버리고 오직 아브라함의 길을 걸어 복에 복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Thursday, August 14, 2014

AUG. 10. 14. 주일강단 : 에덴의 은혜를 회복하라



에덴의 은혜를 회복하라

2:1825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한 쪽에서는 가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리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처럼 무너져 내리는 가정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세워보려고 애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뿐 아니라 인류역사가 참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시대가 타락하여 무너질 때 그 시발점이 되는 것은 언제나 가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아담시대 그러했고, 노아시대가 그러하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시대가 그랬습니다. 어느 시대건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져 내립니다. 가정이 세상을 지탱하는 세포와 같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 사회가 직면한 가정 상황을 매일 일어나는 사실을 한 통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매일 1,000명의 십대 소녀들이 미혼모가 됩니다매일 1,106명의 십대 소녀들이 낙태를 합니다매일 4,219명의 십대들이 성병에 걸립니다매일 500명의 성인들이 마약을 시작합니다매일 1,000명의 성인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매일 135,000명의 어린이들이 총이나 다른 무기를 학교에 가지고 갑니다. 매일 3,610명의 십대들이 공격을 당하고, 80명이 강간을 당합니다매일 2,200명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중퇴합니다매일 7명의 아이들(10-19세 사이)이 살인을 당합니다매일 7명의 청소년들(17세이하)이 살인혐의로 구속됩니다매일 6명의 십대들이 자살을 합니다.
 
이처럼 위험한 시대에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일 뿐 아니라 더 현실적으로 부모와 자식간에는 자연스럽게 세대적 여러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 세대차이는 고래로 부모와 자식 세대간에 직면하는 자연스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우리 가정들은 이중 문화권 속에서 부모와 자식 세대의 가치관과 삶의 갈등이 더 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낮에는 학교라는 미국문화 속에서 밤에는 가정이라는 한국문화 속에서 자라는데 이중 문화의 독특한 혼돈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막히고, 간격이 더욱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을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달리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정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여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만큼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강력히 맞설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먼저 가정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정에 대한 세 가지 메시지를 증거하며 우리 LWC 가정들이 건강하게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창조 때의 가정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마지막에 창조한 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창조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물질세계 곧 배경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이 완성된 후에 그 곳에서 살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땅과 바다가 먼저 창조되고 새와 물고기는 그 후에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중점을 두시는가를 반영합니다. 6일동안 세상을 다 창조하신 후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것들을 보시고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히브리말로 토브라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았다고 7(1:4,10,12,18,21,25,31)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보기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의 목적대로 자기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토브에 부정관사 가 붙어 -토브가 되면 좋지않다”(not good)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창세기 2장에서 -토브가 등장합니다. 사실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니 그쯤에서 -토브등장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조중에 유일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않다는 말이 2장에 나옵니다

218절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토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가 혼자있는 것을 보고 -토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남자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토브를 어떻게 토브로 만드십니까? 계속해서 보세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配匹)을 지으리라
 
아담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곧 아담은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그 인생이 좋지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돕는 배필을 주시면서-토브토브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의 완성으로 가정을 만드시고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토브 므옷이라고 하세요. ‘므옷심히, 대단히이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으로 창조를 완성하시고 대단히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가정의 본질이요. 영광이요. 축복이예요. 하나님은 이 가정을 어디에 두셨어요?  에덴에 두셨습니다. 곧 에덴의 가정이 곧 천국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 때에 가정은 천국으로 지어진 것이예요. 얼마나 보시기에 좋으셨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에덴 곧 천국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있습니다. 그들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랑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삶입니다.  그러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죄가 없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가정을 주셨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가정은 바로 창조의 완성이요, 천국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 에덴의 은혜를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타락 후의 가정
 
그런데 이 천국같은 에덴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모든 사랑의 관계에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때문입니다. 곧 사람이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가정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국같은 에덴의 가정에 5가지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창 3:8을 보세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므로 영적 문제가 생깁니다.

창 3:10을 보세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듣고 두려워 숨어 버리는 정서적 문제가 생겼습니다. 

창 3:12을 보세요.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과 아내에게 핑계 되는 관계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창 3:24을 보세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쫓겨나므로 존재론적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창 3:19을 보세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결국 인간은 죄로 인해 신체적 질병을 갖게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신체적 문제를 갖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 다섯가지 문제가 죄로 인해 가정에 들어오자 가정은 실낙원이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토브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사건들을 보세요. 가정들이 파괴되고 아파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토브의 가정이 -토브의 가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정마다 이 다섯가지 문제가 서로 죄성 속에서 얽히고 설켜지면서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어디보다 그 무엇보다 행복해야 할 가정이 불행해졌습니다.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가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답이 있습니다.
 

구원 후의 가정
 
진 케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정이 평범하고 평온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도, 그리스도와 동거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확한 진단입니다. 천국의 조건은 다시금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함께 살지 않으신다면 그것 자체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라 할지라도 천국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정에 모셨지만 손님으로 모셨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적 위로에 머물기 쉽상입니다. 진정으로 천국을 경험하려면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닮아가는 가족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을 통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아버지가 변화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때문에 어머니가 변화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때문에 자녀들이 변화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로 토브가 다시 토브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행했던 가정이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야 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아무 문제 없는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먼저 말씀드린대로 이 세상이 타락의 다섯가지 문제로 얽히고, 설킨 혼돈 투성이의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 고 이 세상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토브토브로 회복 시키신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적을 통해서 하셨습니까? 물질적 풍요를 주심으로 하셨습니까? 세상 권세를 통해서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로-토브를 토브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 가정의 열쇠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다. 다른 것은 그저 일시적인 것 뿐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담은 가장인 남편에게 가정의 문제에 대해서 핑계를 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아담은 돕는 배필인 아내에게 눈에 보이는 유혹대로 남편과 자녀들을 독려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격려하라고 하십니다.
 
아담은 자녀들에게 내 맘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모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아담의 속성을 담고 아담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본성을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토브의 가정이요 천국의 회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하나님의 가정마저도 세상적 가치를 따라 살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 스도인의 가정들마저 너무 세속화되어 모든 것을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의 각 가정마다 다시금 기회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은 세상 곧 땅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늘의 가치관으로 가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모시고 십자가를 가정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번에 저희 모친께서 위중한 수술을 하셨습니다. 이곳 메릴랜드에 부모님과 5남매가 살고 있습니다. 다들 일하느라 분주한 가운데도 잘 섬겼는데 그래도 마침 시간을 낼 수 있는 저희 가정이 수술전 검사부터 해서 수술과정과 회복에 이르기까지 섬기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많은 세월동안 6남매를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님이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시길 기도하면서 모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간이 없어 마음이 복잡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래도 목사인 내가 십자가를 져야지! 다들 바쁜데 내가 섬겨야지” 며칠 후 하나님께도 어머님께도 죄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삶 그 자체였지 결코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하는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가 온전히 죽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내가 하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시퍼렇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정에서조차 내 공이 되고, 내 목소리를 높이는 기반이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에서 온전히 자기를 부정하고 죽으셨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후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정은 달라야 합니다.

곧 아담이 죽고 예수님이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아담을 죽이고 내 속에서 예수님께서 살아 역사하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그려보십시오. 그곳이 천국이요, 그곳이 에덴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비전대로 9월 첫째주부터 KM EM이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증거할 것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시면서 그날 저녁부터 식탁 가정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혼자 계신 분은 예수님과 함께 예배하십시오. 두 부부만 계신 분은 예수님과 함께 예배드 리십시오. 자녀들과 함께 있는 가정은 자녀들과 함께 예수님을 모시고 식탁가정예배를 드리 십시오.   
 
그렇게 무너졌던 가정 제단을 다시 쌓으십시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로서 잃어버렸던 영적 리더십을 회복하십시오. 아내와 어머니로서 잃어버렸던 돕는 배필의 사명을 지혜롭게 회복하십시오. 오직 십자가의 마음과 섬김으로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정이 되십시오.
 
그것이 부부와 가정과 가문의 거룩한 전통이 되게 세워가십시오그렇게 할 때 우리 주님께서 기뻐 도와 주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돌아 올 것입니다에덴의 은혜를 회복하게 하실 것입니다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LWC의 모든 가정의 주일 저녁에 식탁가정예배가 환하게 밝혀져 '로-토브'가 '토브'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넘치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