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 2014

JULY. 20. 14 말씀으로 사는 교회 주일 강단 : 불꽃처럼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


불꽃처럼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

-1:18-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장 크게 칭찬하신 자가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11:11) 그러면 어떻게 세례요한이 이처럼 큰 자 입니까? 사실 그의 삶을 보면 그는 가진 것도 없었고, 세상의 학문도 배우지 않은 자였습니다. 그는 대도시에서 살지도 않았으며, 훌륭한 동문이나 동창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시골에서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는 특이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브리엘 천사를 세례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에게 보내어 예언하기를 그가‘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5) 그런데 원문에 보면주 앞에 큰 자 ’란 말이 ‘주의 눈 앞에 큰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세상의 눈 곧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눈에는 큰 자 라는 것입니다. 바로 세례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 시대에 과연 하나님의 눈에 큰 자는 누구입니까? 성도는 세상의 눈, 사람들의 눈에 큰 자가 되려 하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눈에 큰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큰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큰 자로 인정받은 것은 그가 자기 삶을 하나님 앞에서 불꽃처럼 살다 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짧은 삶이었습니다. 서른 초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사명을 위해 살다 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또 이 생을 다 마치면 하나님 앞에 가서 설 자들 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하다 왔느냐?’ 그 때에 저와 여러분의 대답이! 주님! 무익한 종은 보내신 사명따라 살다 왔습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불꽃같이 살다 간 세례요한은 어떻게 사명을 위해 살다 갔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렇게 살다가길 소원합니다

먼저 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세례요한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되어졌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40:35) 오늘 본문 2절을 보세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세례요한이 받은 사명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 그가 바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눈에 가장 큰 자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부귀 영화를 다 가졌다 할지라도, 수많은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길을 막고 서게 한다면 그는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가진 것 없지만 나는 배운 것 없지만 나는 보잘 것 없지만 만약 나의 삶으로 주님의 길을 예비 한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삶을 가장 잘 사는 큰 자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과연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세례요한만의 사명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입니다. 3절을 보세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여기서‘광야의 외치는 자’는 세례요한입니다.‘너희’는 우리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선포합니까세례요한은 바로 우리에게‘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는 오직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 영광을 주님께만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성공과 교회의 성장을 자기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자로 쓰임 받는 것으로 감사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40:4)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은 자동차로 메릴랜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를 거쳐 미시간까지 12시간에 걸쳐 달린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길을 잘 닦아 났는지 모릅니다. 특히 펜실베니아는 한국의 동해안 도로처럼 고불 고불 골짜기와 산을 잘 닦아 났습니다. 그래서 달리면서 이쯤에서 터널이 나올 것 같다고 했는데 곧 바로 터널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금 읽은 이사야 40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잘 오시도록, 주님이 오셔서 마음껏 역사 하시도록 우리 심령의 골짜기를 메우고, 큰 산과 작은 산을 낮추며, 고르지 않은 자갈들을 골라내고, 험한 곳을 평지가 되게 하여 심령의 대로를 예비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성도 개인차원에서는 사람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고, 열리게 하여 그 심령가운데 주님이 들어가시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는 이 시대의 높은 산과 언덕들을 낮추고, 골짜기는 메우고, 험한 곳은 평탄케 함으로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도록 손과 발로서 온전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높은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우며, 고르지 않은 곳을 평탄케 하고, 험한 곳을 평지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십자가의 원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 죄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높은 곳 보다는 낮은 곳, 밑바닥을 더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길이 평탄해지고 주님의 하나님 나라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길을 가로막고 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한 교회 교회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까?


회개를 전파하므로 주의 길을 예비하십시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작은 산들을 낮추고,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는 것은 곧 인간의 각 심령에 주님을 맞이할 대로가 놓임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은 깊은 골짜기처럼 움푹 파진 깊은 인생의 상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깊이 패인 골짜기, 부모와 자식 간에 깊이 갈려있는 상처, 여러가지 인생의 난제들로 인해 형성된 골짜기들이 너무나도 인생사에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골짜기들을 메우는 작업이 회개를 통해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주님이 오셔서 그곳을 높여 평지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골짜기에서 신음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온전히 고백하고 삶의 태도와 양식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병원에서 맹장 진단을 받았는데 자신이 맹장인줄 알고 집에 돌아가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맹장이 낫습니까? 절대로 낫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낫습니까? 수술을 해야만 낫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이 죄인 임을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제가 죄인입니다!’하는 고백 만으로도 안 됩니다. 회개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진정으로 고백하며, 그 고백을 행실로 옮겨 죄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선포합니다.(3:71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음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어 불 속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무리에게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리들에게는 당신들에게 정하여진 것보다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협박하거나 무고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한 자매가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매우 어려운 문제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돈을 꾸어준 사람이 있는데 갚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약점을 잡고 반드시 돈을 받아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믿기에 부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께 묻고 다시 생각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헤어졌습니다. 그랬더니 다음에 와서 목사님 말대로 용서하고 돈을 받지 못한다해도 그 사람의 약점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더니 안 갚으려 했던 사람이 매달 잘 갚아 가겠노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맺고 있는 열매가 향기가 나야합니다. 열매가 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그 심령이 낮아지고 메어져 주님을 맞이하게 되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주의 길을 예비하시기 바랍니다.

청빈한 삶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십시오.

6절을 보세요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은 청빈한 삶을 통해서 주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그는 가죽 띠를 두른 약대 털을 평생 입었을 것입니다. 단벌 신사였습니다. 음식은 무엇을 먹었습니까? 메뚜기를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돌 사이에 있는 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옷,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물질적 혜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처럼 풍요 가운데 사는데 속에서는 영이 결핍과 연약함 때문에 쉽게 넘어지고 좌절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요한은 겉 사람보다는 속사람 곧 영의 사람이 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광야로 나아갔고 거기서 삽십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빈들의 영성이 그를 하나님의 눈에 가장 큰 사람으로 키운 것입니다. 그는 바람과 배고픔과 추움과 짐승들을 벗삼아 영의 사람으로 자라갔습니다.(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한국의 지성이라고 불리우는 이어령씨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되면서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다에는 세 가지 유형의 물고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넙치류 - 해저 깊은 곳에서만 살기에 물 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한다.

참치류 - 끊임없이 운동해야만 자신의 유형을 유지하며 헤엄칠 수 있다. 따라서 물속을 벗어 날 수가 없다.

날치류 - 속이 비어 가볍다. 그래서 물속에서 살지만 때때로 물 밖으로 치고 올라가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본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비유가 참 좋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세상에 사는 동안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가볍게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속이 비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이 세상 것에 대해 초연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처럼 없이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를 비어 주의 길을 예비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는 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쉽지 않습니다. 나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를 때에만 주의 길이 예비 됩니다. 두 벌 옷을 가진 자는 없는 자에게 한 벌을 나누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이 풍요한 자는 먹을 것이 없는 자와 나누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더욱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비우는 길이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누지 않으면 빛을 잃고, 맛을 잃는 것입니다. 빛을 잃고 맛을 잃은 교회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보다는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합니다. 교회가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가 빈들의 영성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것 만이 사는 길입니다. 나누어 주는 교회는 행복합니다. 베푸는 교회는 살아납니다. 그래야 세상의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들이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과 그 열매가 교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날 때 주의 길이 예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치형 성도, 날치형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으면서 속이 비어 기도하면 쉽게 천국에 올라갔다 내려와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에 어두워져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말씀 보고 기도하며 하늘의 가치를 보고 눈물 흘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더욱 비우고 비워 주의 길을 예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의 옷, 가구, 물건들, 물질들을 더욱 나누십시오. 살펴 내 드리십시오. 비우십시오. 그러면 주님으로 가득 차실 것입니다. 주의 길이 예비 될 것입니다.

겸손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십시오

7절을 보세요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세례요한은 외적으로는 청빈함으로 주의 길을 예비했다면 내면적으로는 겸손함으로 주의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 그는 주님에 대해 고백하기를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고백입니다. 육신의 혈통으로 보면 그는 예수님 보다 위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 겸손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주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내리시는 것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렇게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그는 광야에 있는 동안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이 예수님이 창조주요 곧 성자 하나님이심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엇 입니까?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 때,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때 그 사람은 참으로 겸손히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세례요한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 보세요.‘내가 먼저 태어났고, 내가 사역도 먼저 시작했고, 내가 제자그룹도 먼저 있었고, 나에게 온 유대 사람들이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 받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세례를 받고’이렇게 생각했다면 그가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세례요한은 먼저 보내심을 받은 목적대로 온전히, 겸손히 주의 길을 섬긴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다 가서 세례를 받는다고 했을 때 요한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주님은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 다.(3:30)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삶입니다. 주님만 흥하시면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도 흥하시고 나도 흥하게 하소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주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을 오직 예수님을 위해 불꽃처럼 태우다 간 사명자였습니다.  

우리 속에는 너무나 많이 ‘나’ 와 ‘내 것’이 살아 역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관없고 오직 나, 나의 영광만 있으면 만족하는 유혹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참으로 빈들의 영성으로 ‘나’와 ‘내 것’ 그 모든 것을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데 내려 놓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세요. 사복음서에 잠깐 나타나다 어린 아이의 춤 선물로 그의 머리가 소반에 담겨 죽고 맙니다. 세상 권력의 음란과 타락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 권력의 칼에 죽고 맙니다. 그는 참으로 짧은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구차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위대한 순교자로 생을 마감 한 것입니다. 그 피로 주님의 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입니다. 진정 그는 쇠하였고 주님은 흥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짧습니다! 살같이 빠릅니다! 무엇을 위해 여러분의 짧은 생을 불태우시다 가시겠습니까?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는 시에서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 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했습니다. 오늘 이시간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여러분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인생은 다 그런 거야? 그냥 살다 가는거지란 생각을 버리십시요. 정신을 차리고 남은 후반전을 세례 요한처럼 다시 오실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삶에 불꽃처럼 함께 타오르세요. 그렇게 우리 함께 왕의 다시 오심의 길을 준비하여 예수님은 흥해지고 나는 쇠해지는 삶을 살아 세상의 눈,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앞에 큰 자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