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신앙을 따라 삽시다!
욥1:1∼5
지난 주 가족과 함께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1600만명을 넘어선 명량을 보았습니다. 이국 만리 미국 땅에서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니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어린 시절 떠나왔지만 영화를 보고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안위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내놓고 싸우는 리더와 그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백성의 하나된 마음이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진 나라를 건져내 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이렇게 살게 만든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삶 그 자체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들이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택하라면 이순신 장군을 택할 것입니다. 못보신 분들은 가족들, 특히 자녀들과 함께 꼭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조국이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 우리에게 거저 삶의 터전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앞선 누군가의 생명과 헌신의 값으로 오늘 우리가 이처럼 자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고, 우리 또한 후대에게 보다 낳은 가치의 삶을 물려주는 사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 놓으신 예수님 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롤모델로 선택하실 자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일 것입니다. 지난 번에 다윗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또 다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소개하기 원합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욥은 성경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직접적인 언약의 후손 이란 근거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욥이 살던 시대를 족장 특히 야곱시대로 보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던 고향을 북 아라비아, 에돔지역으로 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백성을 부르시지만 하나님의 주권하에 보다 폭넓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욥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의 시대의 구원 문제를 논의할 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욥을 살펴봄으로 저와 여러분도 욥의 신앙을 따라 사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욥이 우리가 본받아야할 롤모델이 될까요? 그의 신앙과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욥의 삶의 네가지 특징
먼저 욥의 삶에는 네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이전에 욥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욥1:8b장과 욥2:3b에서‘하나님께서는 욥과 같은 자가 세상에 없다’고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를 다 알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욥과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욥을 그렇게 인정하실까요? 하나님은 욥의 네 가지를 주의하여 보셨습니다. 욥1:1을 보세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더라
(1) 온전함 (blameless)
욥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평가는 그가 온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타밈’이라는 단어인데 예전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말씀을 드릴 때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도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고 요구하셨습니다. 모세를 통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너는 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신18:13)고 하셨습니다. 특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삼하22장 24절에 보면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로 ‘완전’으로 번역된 단어가 동일한 ‘타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도 온전하다는 ‘타밈’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욥이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동일한 죄인입니다.
욥6:24을 보세요.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욥7:21을 보세요.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 시니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 하리이다.
앞에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하면 자신이 더이상 변명하지 않고 잠잠하겠다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하나님께 왜 자신의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죄악을 제거해 주시지 않으시냐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앞의 허물과 뒤의 허물이 우리 말로는 번역이 같은 단어로 되었지만 원어는 다릅니다. 앞의 허물은 ‘솨가’라는 말인데 ‘길을 잃다, 빗나가다, 실수하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뒤의 허물은 ‘페솨’라는 말로 ‘위반, 범죄’곧 법을 어긴 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의 허물은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 친구들이 네가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주장을 하는데 욥은 자신이 그럴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상대적인 허물, 특정된 허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구절의 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죄, 인간의 범법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욥이 온전하다고 하시는 것은 욥이 죄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욥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흠이 없는 존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죄인임을 늘 고백하면서도 삶 속에서 진실하고 흠없이 살고자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온전한 삶입니다.
(2) 정직함 (upright)
하나님의 욥에 대한 두번째 평가는 정직함입니다. 이 말은 ‘야솨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이‘곧다, 옳바르다, 의롭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어원을 보면 ‘마음에 들다, 합치하다’이런 의미가 있어요. 곧 욥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 적으로, 윤리적으로 옳고, 바른 삶을 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 정직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옳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면 삶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의롭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다고 하면서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속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함 (feared God)
욥에 대한 하나님의 세번째 평가를 보세요.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경외’라는 말이‘야레’란 말인데 기본어가‘두려워하다’,‘무서워하다’의 의미 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 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막연한 무서움,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된 우리가 겸손함으로 무릎꿇음이요, 하나 님의 주권에 대한 존경과 위엄 앞에 서는 태도입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훌륭하고 부귀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적신으로 보내시고 적신으로 데려가시는 분 곧 절대 주권자임을 알고 그 분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경외한 것입니다.
욥이 28:2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하는 함이 지혜요.
여러분!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수고 하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12:13,14)
욥은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는 나를 경외하는 자’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세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여러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4) 악에서 떠남 (shunned evil)
여기서 ‘악’의 원뜻은 ‘로아’라는 말에서 왔는데 ‘나쁜’이란 의미로 도덕적인 악, 윤리적인 죄와 악을 말합니다. 욥은 28:28b에서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떠났다’는 말은‘쑤르’라는 말인데‘얼굴을 외면하 다 ’,‘떠나다’,‘돌이키다’이런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 하시는 근거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욥 스스로가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는 것을 알았고, 고백하고, 노력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가치관을, 가치관은 감정을, 감정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생각덩어리 자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온전히 바뀐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하나님이 욥의 인생을 평가하실 때 이 네 가지 ‘온전하다, 정직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다, 악에서 떠났다’가 그의 인생의 대표적인 모습이 된것입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1:1에 이어서 1:8절과 2:3절을 보세요. 동일하게 욥에 대해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십니다. 동일한 평가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욥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 또한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자입니다.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욥처럼 더욱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늘 살아가려고 애씀으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존귀한 여러분 한 분 한 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초지일관한 욥의 행위
놀랍게도 성경은 욥의 삶의 이 네가지 특징이 하나의 어떤 특별한 행위로 지속적으로 패턴화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b을 보세요.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무엇이 어떠 하였길래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다고 하실까요?
욥에게는 아내와 아들 일곱, 딸 셋 곧 10남매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유는 양 7,000마리 낙타 3,000마리 소500겨리 암나귀 500 마리와 종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동방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복과 관련해 그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장성한 욥의 아들들은 각자의 집이 있었고, 그들은 각자의 생일이 되면 형제와 자매들을 초대하여 1년 내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자녀들이 잔치를 끝내면 늘 똑같은 행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잔치가 끝나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 님께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각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 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의 말을 들어 보세요.(5b)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여기 보세요.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욥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아들들이 더욱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더욱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가 자녀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번제는 그의 아들들을 대신해 동물을 완전히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동물을 왜 태워 죽입니까? 번제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데 동물이 대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욥은 그의 아들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인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 죄성이 잔치 속에서 먹고 마시며 흥분할 때 쉽게 나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들들의 숫자대로 번제를 드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늘 바른 관계 속에 있기를 소원하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우리 자녀를 잘 키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잘 키운다는 것이 단지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이 뒤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아니 절대순위입니다. 이번 여름에 저의 아이들과 며칠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아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피지컬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제법 근육이 솟아났고 매일 밤마다 저를 데리고 트레이닝을 시켰습니다. 함께 하니 좋았습니다. 며칠동안 아들을 통해 훈련을 받은 후에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의 피지컬 코치가 되어 좋다. 그렇게 해라. 나도 너의 스피리철 코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좋다고 웃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대학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실력을 쌓으며 영적 고민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벽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해 간구할 때 이 아이의 이름도 부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새벽마다 이 아이를 위해 무릎꿇을 수는 있습니다.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부모의 사명이요, 복입니다.
욥을 본받아 이제 식탁가정예배를 잘 드리십시오. 출타한 자녀가 있는 가정은 두 부부가 식탁가정예배에서 자녀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주일 저녁에 한 번 식탁에 둘러앉아 부부가 예배하십시오. 하나님앞에서 자녀의 이름을 올려드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십시오. 이 복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게의 행위가 늘 이러하 였다라고 인정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까지 네가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며 그런 자가 세상에 없다고 자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까지 자랑하는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 보실 때 참으로 욥처럼 사탄에게 ‘네가 메릴랜드의 말씀의 교회 000 성도를 보았느냐?’라고, ‘더 나아가 네가 말씀으로 사는 교회를 보았느냐?’ 라고 자랑하실 수 있는 성도, 가정,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