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7, 2014

NOV. 2. 14. 주일강단 : EPH SERIES 9 본받으며 삽시다!

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9




본받으며 삽시다!

5:114
 




1850년 나다나엘 호돈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고향을 감싸고 있는 산 위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가까이에서 보면 크고 넓은 바위들이 얽혀 있는 모습에 불과 한데 거리를 두고 보면 인자하고 거룩한 형상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과 같이 보였습니다. 구름이 드리우고 노을이 있는 황혼에는 더욱 장엄함과 평안함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포용하고도 남을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어니스트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이 생긴 위대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지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어니스트 또한 그 예언을 믿고 일평생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는 반가운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의 고향 출신으로 세상에 나가 큰 돈을 번 개더 골드’(Gather Gold)라는 사업가가 이제 노년을 고향에서 살려고 궁궐같은 큰 집을 고향 땅에 짓고 막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드디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온다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개더 골드가 마차를 타고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가 큰 바위 얼굴과 똑같다고 소리쳤습니다. 고개를 들어 개더 골드의 얼굴을 본 어니스트는 실망을 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고향 출신의 전쟁 영웅인 한 장군이 호위병들을 거닐고 귀향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그 장군을 보자마자 큰 바위 얼굴과 똑같다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이번에도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기대하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또 흘러 고향 출신의 위대한 정치가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웅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각 나라의 지도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이 나와 그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쌍둥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큰 바위 얼굴이 드디어 자기 짝을 만났다고 노래했습니다. 사람들 틈새로 겨우 그를 쳐다 본 어니스트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니스트는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인이 되는 그날까지 날마다 성실하게 일을 마치고 집밖 그네에 앉아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그를 닮은 자를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부터인지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샘솟는 말들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숲 속으로 모여 어니스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황금빛 노을이 큰 바위 얼굴에 비추었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구름은 마치 어니스트의 백발과 같았습니다. 그 순간 어니스트의 얼굴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생각에 일치되어 자비심이 섞인 장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중 한 시인이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쳐들고 외쳤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 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사람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을 늘 바라보면서도 돈이 많은 사업가나, 전쟁영웅인 장군이나, 탁월한 정치가나, 표현의 화신인 문학가를 큰 바위 얼굴과 똑같다고 외쳤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그리던 큰 바위 얼굴이 바로 그 모습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달랐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의 본 모습을 알고 있었고, 늘 그를 바라보고, 닮은 자가 나타나기만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단편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를 기다리며, 누구를 닮아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바울은 오직 우리가 닮아가야 할 분이 계신데 그가 누구라고 합니까? 5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받고 닮아가야 할 분은 오직 우리 주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본받되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은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어니스트처럼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바로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예전에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잘못되고 위험한 확신으로 교회를 헐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되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후에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여러분, 정말 바울을 살펴보면 그의 메시지, 그의 삶, 그의 언어, 그의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똑같이 닮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는 날마다 순간마다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사모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에게도 이제는 너희도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는 부족한 종과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무엇을 본 받으라고 합니까?

1. 사랑을 행하심을 본 받으라!

2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첫번째 것이 예수님의 실천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데 그것이 먼저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족한 종도 이것이 숙제입니다. 날마다 남을 위하여 나를 버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주님이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만세 전부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으로 계시될 때부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기의 그 처절한 제물들 속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구약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천상에서 성육 신하여 인간으로 오실 때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제자들을 훈련 시킬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땀이 되어 흐를때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헤롯의 법정에서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마음, 십자가의 삶을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아세요? 향기로운 제물이요,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심이 되셨다고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헌신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향기로운 제물 되심은, 예수님의 희생제물 되심은 곧 예수님의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마음이요, 삶이요, 예수님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우리에게 이처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아 행하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나 버림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강권 적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부어주사 주님의 사랑으로 살수 있게 해 주소서! 은혜를 부어주 소서!”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어떤 거창한 업적이 아닙니다. 큰 이벤트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향기로운 제물의 삶이요,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나 버림의 삶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직 성령안에서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실 때 비로소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본 받기 원하시는 삶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빛의 거룩한 삶을 본 받으라!

8a절을 보세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에는 무엇이었다고 하세요? 어두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두움에 속했다고도 안하고 어두움이었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로 인해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이었을 때는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두 말할 것 없이 어두움의 근원인 사탄과 그의 모습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이 어떠하다고 합니 까? 3절을 보세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음행을 행합니다. 온갖 더러운 일을 합니다. 그리고 온갖 욕심, 탐욕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 탐심은 5절에서 곧 우상숭배자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항상 탐심과 우상숭배를 동일하게 봅니다. 그러면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들이 죄인 것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요? 어두움 가운데 있으니 그것이 죄로 보이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보세요. 죄의 속성은 어두움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행하고, 숨어서 은밀히 행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떠하다고 하십니까? 5절을 보세요.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자 이러한 어두움 가운데 사는 자들은 에베소서에서 계속해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나라는 빛의 나라요, 거룩한 나라요, 영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갖고는 어두움의 삶을 해결 받지 않고는 절대로 빛의 나라로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두움 그 자체의 삶을 산 자들은 어떻게 된다고 하세요? 6절에 보세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성도가 되었으니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7)

이제 바울은 우리가 어떤 존재라고 하냐면 8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신 희생제물로 인해 우리가 이런 어두움에서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십니다. 어두움이 십자가의 보혈로 다 씻겨 나가고 예수님 안에서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속자답게, 왕자답게, 공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 답게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3절을 보세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바니라

4절을 보세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6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11절을 보세요. 너희는 열매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 도리어 책망하라  

위의 말씀은 이제 빛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어둠의 이름을 부르고, 어둠의 말을 하고, 어두움에 속고, 어둠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면서도 순간적으로 죄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지요. 욕심과 탐심에 넘어질 때가 있지요. 그러나 속히 빛 가운데로 나아와야 합니다. 계속해서 어둠 가운데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므로 빛의 자녀들답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 들로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9절을 보세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열매가 나타나야 빛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첫째는 모든 착함입니다. 곧 모든 착함 속에 빛의 열매가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착함은 파세 아가도쉬네란 말인데 모든 너그러움, 모든 선함을 의미합니다. 곧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대화 속에서, 상황 속에서 모든 너그러움과 선함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디카이오쉬네공정, 공의, , 경건이 런 의미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 답게 삶 속에 의로움 을 따라 살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여기서 진실함은 알레데이아인데 숨김이 없다는 의미 입니다. 진리, 성실, 정직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우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의롭고 공정하고 공의로우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진실하고 정직하신 진리 자체이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빛이신 예수님의 열매를 이제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입니까? 우리 자신의 부패함을 보면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너희는 더 이상 어두움이 아니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실 때는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성은 그렇게 살 수 없으며 우리의 영성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만을 바라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는 말이 좀 번역이 명확치 않습니다. “도키마조라는 말인데 입증 하다, 시도하다, 증명하다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그러한 삶을 살아보라,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증명해 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바울이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아니 명령을 합니다. 더 이상 성도로서 부끄러운 일이 나 열매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력히 도전합니다. 14절을 보세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요, 비밀을 맡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요, 빛입니다. 곧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곧 예전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에는 사탄을 닮아갈 수 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잠에서 깨시기를 축원합니다. 잠에서 깨어 날마다 우리의 큰 바위 얼굴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사모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히 자신을 버리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고 바라보며 사모하며 닮아가면 우리도 모르게 빛을 열매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있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날까지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