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9, 2014

NOV. 23. 14. 주일강단 : EPH SERIES 12 무장하여 삽시다!

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12




무장하여 삽시다


6:1024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아울러 우리 공동체는 에베소서의 마지막 메시지에 이르는 날 입니다. 얼핏보면 에베소서와 추수감사주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동안 에베소서의 말씀을 따라 깊이 묵상해 보면 추수감사주일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온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공동상속자로서 그의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핍박과 환란, 자유와 모험, 추위와 배고픔, 먼저 간 가족과 살아 남은 가족, 파란만장한 역경속에서 인디언을 초대해 함께 한 첫 수확의 감사의 예배가 바로 추수감사 주일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청교도들의 신앙의 순례 곧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역사를 이루며 살아간 모든 여정이 다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 청교도들의 신앙의 여정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과 동일합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에베소서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의 순례는 똑같습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절은 가장 혹독한 추위와 질병 그리고 고통속에서 지킨 위대한 신앙의 승리요 전통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욱 감사한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의 고백 입니다. 이 동일한 은혜와 감사가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공동체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랍고 놀라운 일입 니다. 작년 추수감사주일에 우리가 오늘과 같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 함께 인사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해피 땡스기빙,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오늘 에베 소서는 마지막 결론에 이릅니다. 바울은 매우 힘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의 결론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강건하여져라
 
10절을 보세요.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여기서 끝으로마지막으로이런 말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란 것입 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보세요.“강건하여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엔뒤나모오란 말인데강하게 되라는 수동형이예요. 하나님의 상속자로 구원의 경주를 끝마치는 날까지, 교회가 만물을 다스리는 그 날까지 강건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강건해지라고 하십니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이미 1:19절에서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이예요. 똑같은 구절을 사용해서 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 성도가 강건해질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안에 있는 그 힘의 능력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능력만이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주 안에서와 그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보다 사람의 수나, 헌금의 수나, 건물이나 그 외에 다른 것으로 강건해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 속는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강건케 하는 것은 오직 예수와 그의 능력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르게 말씀드리면 우리 교회나 성도는 얼마든지 예수와 그의 능력으로 강건해 져야하고 강건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강건해지라고 하세요? 우리에게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적과 싸워야하기 때문에 강건해져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는 져요. 상대가 안돼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져야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대적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대적은 계속해서 우리가 말해왔듯이 내 안에 있는 대적입니다. 아담 곧 죄성입니다. 둘째 대적은 내 밖에 있는 곧 사탄과 그의 세력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밖에 있는 대적들과 싸워서 이기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과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지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곧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치는 두 대적과 싸워 이기는 비결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싸움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라고 하십니까?

 
2. 전신갑주를 입으라
 
11절을 보세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십 니다. 마귀의 간계는 메도데이아술책, 속임, 사기, 교활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온갖 교활함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것입니다. 나의 전신갑주 가 아니예요. 곧 인간의 힘, 인간의 지혜, 인간의 능력이 아녜요. 오직 하나님의 옷을 입어야 해요. 그 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무장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영과 마음과 삶에 무장해야 마귀의 간계로 부터 승리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밖에 있는 영적 싸움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알려 주세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계속해서 12절을 보세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 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들이 바로 마귀의 간계를 이 땅에서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의 세력들과 성 삼위 하나님과 그 교회가 영적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승리하셨고 이제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시면 이 전쟁을 끝날 것입니다. 바로 그 날까지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교회가 전신갑주를 입고 서서 마귀와 그의 세력들을 대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승리를 쟁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골리앗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중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을 때 하나님의 군대는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어요.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자에게 무슨 상이 있는지 듣고 있을 때 그의 장형이 봅니다. 그의 장형 엘리압은 다윗을 공격합니다. 다윗을 대적으로 여깁니다. 왜요? 자기의 기름부음 곧 왕이 됨을 빼앗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윗이 교만하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비난을 해요. 그러나 다윗은 형을 상대하지 않아요.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하고 돌아서요. 더 이상 그와 상대하지 안해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니예요. 다윗은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어요. 만약 다윗이 엘리압의 시비에 넘어지고 거기서 싸우고 큰 소리를 냈다면 그는 이미 사울의 군사들에 의해 전쟁터에서 쫓겨났을 것이예요. 골리앗과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우리가 속는지 몰라요. 우리의 대적은 사탄과 그 악한 영들인데 우리는 혈과 육을 대적으로 알아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성도가 대적이 돼요. 내 의견과 다르면 대적이 돼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대적으로 여기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들과 싸우면 안됩니다. 그러면 마귀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적을 분명히 아는 성도는, 교회는 속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감쌉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합니다. 무엇을요? 우리 사이에서 이간질하고 교활하고 속임수로 나뉘 게 하고 분리케 하는 사탄과 그의 간계가 물러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안에서 그의 힘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엇을 말합니까? 14절을 보세요.
 
먼저 그런즉 서서 라고 하셨어요. 무엇을 말씀하세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지요. 군사는 무엇보다 군사다운 태도와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대적과 싸워 승리하신 대장되신 예수 옆에 우리 하나님의 교회가 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갖추고 전열을 갖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에서 좀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시니까 당시 로마의 군사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어요. 바울이 아마 군사들을 보고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이사야 59 17
공의를 갑옷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이사야 11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요한계시록 19 11절∼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여 싸우더라 그 눈을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것이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 전신갑주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이 공의의 갑옷, 구원의 투구, 공의와 성실의 띠, 예리한 검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며 우리 곧 교회가 이 갑옷을 몸에 갖추어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적용도 중요하지만 더욱 교회 차원의 군대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6가지의 갑주를 말합니다.  
 
(1)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허리 띠는 옷을 몸에 밀착시킴으로 모든 갑주가 몸에 일치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와 그에 따른 진실, 성실함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2)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호심경은 가슴을 막는 흉갑, 흉배라고 하는데 가슴 곧 심 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엇으로요? 의는 디카이오쉬네공정,정의, 공의,정직을 말합니다. 곧 공의로움과 정의로움이 교회를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의와 정의가 넘쳐야 합니다. 
 
(3)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신은 갑주 중애서도 얼마나 중요합니까? 신이 없다면 어떻게 대적과 싸울수 있을까요? 신이 발에 맞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편안하고 가벼워요. 자유함 가운데 걸을수도 뛸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해준 평강이 교회 안에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4)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허리 띠나 가슴 흉배나 신은 각 몸의 부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 모든 것 위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자유 자재로 대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입니다. 방패는 위 아래 사방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대적 이 공격해도 막을 수 있는 전천후 보호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로써 능히 악한 자 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5)  구원의 투구 투구는 머리에 쓰는 것으로 머리가 노출되면 치명적입니다. 그러므 로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 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진리와 역사가 가장 중요한 것 입니다. 그러므로 늘 구원의 진리를 사수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6)  성령의 검 – 6개의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유일한 공격용 무기입니다. 다섯 가지는 전부 방어용이요, 보호용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성령의 검이 우리 교회의 무기인 것입니다. 이 성령의 검이 무엇이라고 하셨어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은 레마입니다. 말씀에는 로고스레마가 있어요. 쉽게 말씀드리면 로고스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이고, 레마는 주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곧 객관적인 말씀이 주관적으로 교회 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을 말해요. 곧 성경이 교회의 성령의 검으로 무기화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 시대에 구약 성경은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금식후 사탄에 공격해 올때 세 번의 말씀으로 물리치세요. 이것이 레마요, 성령의 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켜, 행해야만 사탄이 공격할 때 그 말씀이 내 심령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레마가 되어 그 말씀 으로 대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의 유일한 무기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통해 레마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6가지가 교회가 서서 입어야 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진리와 의와 평안의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성령의 검으로 완전 무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온전히 무장되는 우리 교회와 성 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그런데 성경은 전신갑주를 입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18절을 보세요.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6가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더욱 빛나고 튼튼하게 하고, 성령의 검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이 한 구절에 기도하라는 말씀이 5번이나 등장합니다. 전신갑주와 기도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진리와 의와 평안의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성령의 검으로 더욱 무장되어 지는 것입니다. 마치 기도는 군사들의 함성과 같아요. 함성소리가 크면 클수록 사기가 오르고 대적과 싸울 용기가 생기듯이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교회의 속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면서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 달라고 도고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19) 바울은 특히 기도의 필수적인 대전제는 항상 성령 안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교회가 이처럼 대장되신 예수님 곁에 서서 이미 승리하신 도성을 지키는 무장된 군대가 되기를 날마다 때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을 보세요. 그가 누구와 대적하여 싸웁니까? 골리앗입니다. 당시 골리앗은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최고의 무기를 다 가졌습니다. 그가 40주야를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합니다. 사울도 다윗의 세 형도 그 누구도 이 골리앗을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단지 물맷돌 5개를 갖고 나갑니다. 싸움이 안되는 것이지요. 누구보아도 말이 안되지요. 그러나 영안을 열어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완전무장을 한 것입니다. 그는 진리의 허리 띠를 둘렀습니다. 의의 흉배를 찼습니다. 거인앞에서도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었습 니다. 믿음의 방패를 돌립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으로 물맷돌을 던지는 것입 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사랑하는 형제 두기고 편에 이 놀라운 에베소서를 전달한다고 하면서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서신을 마칩니다. 이제 우리의 에베소서 여행도 마치지만 오히려 이제부터 더욱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우리 주 예수안에서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며,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 대적과 맞서며, 부르심의 소망을 향해 순례의 행진을 하여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로 서는 그날까지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역사가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Friday, November 21, 2014

NOV. 16. 14. 주일강단 : EPH SERIES 11 충만하여 삽시다 2

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11




충만하여 삽시다2


5:1533
 





하나님께서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한가지 너무나도 귀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눈을 갖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두 가지가 있습 니다. 

먼저는 망원경적 눈입니다.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르심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어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실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비전이요, 소망이요, 방향입니다. 이 비전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인생의 방향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혼돈과 방황속에 헤메이고 맙니다. 그러나 비전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면 인생이 클리어해 집니다. 어디로 가야할 줄 압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현미경적 눈입니다. 에베소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망원경적 시각을 우리에게 주 는 동시에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줍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 이제는 어떤 존재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게 하는 것입 니다. 그래서 하나되어 일치되고, 거룩하게 살고, 사랑안에서 행하고, 빛안에서 행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두 눈으로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의 전반부 13장의 말씀은 계시를 통해 바로 이 두 눈을 갖게 하는 것이고, 또한 에베소 성도들이 이 눈을 갖게 해 달라고 두 번 이나 간절히 도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에베소서의 후반부 46장은 그 하나님의 세계관을 갖은 우리가 이제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옛사람과 전혀 다른 새사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말씀이 바로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이 악한 때에 기회를 다시 사는 삶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주신 기회 곧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 시는 기회, 어둠이었는데 이제는 빛이 되어 살게 하시는 기회가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기회를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기회를 산 모든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입니 다.

성령의 충만함의 열매는 무엇이라고 했어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게 만들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항상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피차 복종하는 성숙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함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은 바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인 부부사이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의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만 합니까?


1. 가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에서 먼저는 부부 사이고, 그 다음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이 본문이 계속이어지는 것이예요. !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부부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히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위해 다 내어 주는 것이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원리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충만함이 어떤 관계 속에 나타날 때는 항상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 도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충만함이 없게 되면 부부 사이에도 예수님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타납니까? 아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이 나타나면 자기 주장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사랑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투게 되고, 상처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 니다.         

이 원리는 부모와 자녀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6 1절을 보세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5 18절 곧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키 구절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 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딤후3:1,3)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이 자기 중심적이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과 교만 가운데, 비난과 비방 가운데 살아 가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보다 더 배웠고, 옳고, 잘 안다는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겉으로 말을 안하고, 드러내지 않기에 그렇지 자녀들의 공경치 않음과 불순 종 때문에 속이 썩은 부모들이 한 두 가정이 아니예요.  

그러나 부모가 성령이 충만하고 자녀도 성령이 충만하면 전혀 다른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은 부모에게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예요. 남편과 아내가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부모와 자녀가 각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보세요.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셨어요. 태중의 세례요한이 태중의 예수님을 알아봐요. 그래서 모친이 서로 만날 때 태아가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해요.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신 것입니다.(1:4144)  

사무엘을 보세요. 어린 시절에 얼마나 성령이 충만한지 몰라요. 엘리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났는데 어린 사무엘에게는 성령이 임하여 말씀하시잖아요.

예전에 대구 동부 교회에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어요. 김덕신 목사님이세요. 대구 지역에 큰 부흥의 통로가 된 종이었어요. 이 분의 간증을 들어보니 여덟살쯤에 동네에서 무당이 큰 굿을 하는데 그것을 구경갔다고 해요. 그런데 무당이 굿을 하다가 오늘은 굿이 안된다는 거예요. 작두에 올라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린 김덕신 앞으로 오더니 바로 이 아이 안에 예수가 있어서 굿을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자녀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예수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성령의 충만 함을 받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살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강청을 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성령충만하면 부모를 공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 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주 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아담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 충만하면 부모를 공경하기가 쉽지 않아요. 왜요? 아담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았잖아요. 그 아버지의 말씀을 어겼잖아요? 그러니 아담으로 충만하면 하나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도 제대로 공경치 않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세요. 아버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셨어요. 예수님이 얼마나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예요. 그런데 자신을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겠다고 하십 니다. 최고의 효자가 예수님이세요.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성령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하여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셨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세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 계명인데 그것만 잘 해도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우엉캐기)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부터 이러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녀들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하실 뿐만아니라 4절에는 아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씀의 이면은 아버지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녀 들이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나머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쏟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으로 대하면 아이들 안에 노여움이 쌓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성령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서 아이들을 대할 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충만하면 아이와 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먼저 회복한 후 대화하세요.

그러므로 여러분!

식탁가정예배를 귀하고 복되게 여기셔야 합니다. 밥먹으면서도 감정으로 자녀들에게 말하기 쉬운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나 식탁가정예배에서 예배드리면 성령의 충만함이 그 식탁 위에 임합니다. 아버지에게 임합니다. 자녀에게 임합니다. 부드러워집니다. 사랑이 넘칩니 다. 주의 교훈과 훈계가 흘러 나옵니다.

저 자신도 사랑하는 딸 아이와 에베소서 전체를 이렇게 식탁가정예배를 통해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이렇게 지금 할 수 있는 가정은 복중에 복이예요. 그러나 아직 안되는 가정은 부부가 먼저 간절히 예배하고 기도하며 자녀들이 성령충만해서 식탁 가정 예배가 가문 대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가정 대대로 반드시 흘러 넘치게 될 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아멘!   

 
2. 사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 모든 사회분야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임을 말씀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변화되었다면 그 변화의 영역은 모든 삶 전반에 미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었다고 하면서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만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모든 면에서 변화의 모습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당시 노예와 주인의 관계 곧 사회적으로 가장 심각한 위화감이 있는 관계에서조차 성령의 충만함 속에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노예된 자들에게 노예 해방의 극단적 선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상전에게 성실함으로 순종하라고 합니다. 마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 나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려는 것은 그런 제도적 개선을 말하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더더욱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하나님의 성도들, 장차 상속자들의 성숙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의 신분이 노예인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노예의 신분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니 반기를 들고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집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속여 기쁘게 하려는 자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십 니다. 곧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노예라면 그리스도가 충만한 노예로서, 곧 성령이 충만한 노예로서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 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행하는지 보시고 그 행한대로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로서나 주인으로서나 중요한 것은 신분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각 존재요, 각 존재의 삶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는 노예나 주인이나 이러한 외적 신분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벗겨낸 그 속사람, 인격, 삶의 태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가 없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로 살던 주인으로 살던 하나님께 더 중요한 것은 그 각 사람 존재 자체인 것입니다. 9절을 보세요.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 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보세요. 여러분! 주인들의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신분으로 노예를 위협하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들, 상전들 곧 권세 있는 자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입 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상전이 하늘에 계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곧 상전들이 자기 위에 있는 상전이 계심을 알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현대적으로 보면 여러분이 종업원으로 일하시거나 사장으로 일하시거나 그 위치나 신분과 상관없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오직 여전히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아담이 사라지고 예수님이 충만하여 살아 역사 하실 때 세상에 나가서 어떤 관계 속에서든 예수님의 향기와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가 누구와 누구의 관계인지 아십니까?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와 그의 메니저와의 관계입니다.

보아스는 항상 자기의 보리밭의 일군들을 만나면 첫인사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 기를 원하노라(2:4)라고 합니다. 그러면 일군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니 이다 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모습이예요? 성령충만한 사장의 모습이요, 성령충만한 종업원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 한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집에서는 성령충만한 남편이 되는 것이고, 사회에서도 성령충만한 사장이 되고, 직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충만하면 모든 관계 에 예수님이 나타나셔 중재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곳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성령충만, 예수충만의 삶이 상속자로 완성되는 그 날까지 저와 여러분 삶 가운데 넘쳐 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