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4:14∼16-
우리의 믿음 생활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이성에 기초를 둡니다.
이러한 분은 합리적으로 납득이 가는 것만을 받아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역사에 대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자신이 체험한 경험에 기초를 둡니다.
체험은 귀한 것이지만 잘못하면 자신의 주관적 체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 체험만을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이성과
경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이성과 경험은 모두 인간 자신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
우리 믿음에 더욱 기초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거짓된 것이라면 이것처럼 심각한 오류의 근원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이미 거짓이면 아무리 이성적으로 납득을 하고, 경험과 체험이 많다 할지라도 그
신앙은 거짓의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는것 밖에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썩어 끊어지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우리의 마음 이전에 더욱 중요한 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냐? 믿지 못할 거짓 존재냐?
이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의 기초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저 사람은 믿을 수 있어!' 라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의
말과 삶이 일치할 때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말은 좋은데 그가 말한 대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사람과의 신뢰도 이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믿음의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 가지로 인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입니다. 둘째는 그 인격과 속성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셋째는 그 인격과 속성에서 나온 말씀대로 사신 삶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살아계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공의와 사랑을 비롯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인격과 속성에서 나오는 말씀은 진리이고 그것이 진정한 진리임이 확증되는 것은 그 말씀대로 사심 곧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짓 신이 아닌 진리의
신이심을 드러내는 증거는 자신의 인격과 속성에서 나온 약속의 말씀대로 성취하심이 일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거짓되면 그것은 거짓 신이요,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그 말씀 그리고 삶이 역사 속에서 일치하셨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성과 경험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화답하여 순종함으로 진정한 신앙의 기초를 뿌리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이 말씀으로 나타나고, 그 말씀이
성취됨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속에
바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약속의 말씀, 그 말씀대로 인간으로 오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심의 역사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누가 진리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진리임을 증거 합니다. 바로 이 성취의 구속 사건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리의 기둥으로 세워져 우리의 믿음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의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성취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의 기둥을 세워주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 진리를 증거하기 원합니다.
1. 십자가와
부활 이후는 승천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여기 보세요. 마지막 구절에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가 바로 '호몰로기아'란 말로 '일치','고백'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믿어야 하는 교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요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자가 없고...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이것은 승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벌써 이 구절에서
승천과 재림 곧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의 진리의 다섯가지 기둥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승천하신 이'라고 하실 때 그 원뜻은 '여러 하늘을 가로질러 올라가신 이' 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셋째 하늘에 올라갔었다고 하였습니다.(고후12:2)
그곳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하늘의 하늘이라고 했습니다.(시148:4) the
skies 와 highest heavenly 을 구분해서 말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소위 칠층천까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사탄이
공중의 권세를 잡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이것이 다 영적 전쟁을 치르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곧 여러 하늘을 뚫고 올라가셨다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을 물리치고 올라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들을 삼키고자 하나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12:5b)고 하심으로 승천 자체가 치열한 영적전쟁임을 계시하십니다.
바로 이 승천의
진리의 교리를 굳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까지 구속역사를 위해 영적 전쟁을 다 치르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맞이 하십니까?
행2:29∼33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시고 승천케하셔서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심판이 챔피온의 손을 높이 들어 승리를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육신을 통해
이 세상에 파송하시고, 십자가로 구속역사를 이루시고,
부활로 사망권세를 깨고, 승천하여 진정한 임금과 구주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은
예수님의 구원 역사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성도와 교회는 오직 이 다섯 가지 진리의 기둥 곧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의 우리의 믿는 진리를 굳게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넘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승천하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1) 대제사장
사역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대제사장 역할을 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구약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먼저 세움으로 진짜 대제사장직이 나타날 때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신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자요 제사 드리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돼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천상의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자신이 핏 값으로 주고 사신 자기백성 곧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니다. 이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소위 자칭 중보기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어떤 사람 사이에 자신이 중보자가 되어 있다는 말이예요.
이 말을 잘못 사용하면 자신이 예수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 없으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요. 그저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15절을 보세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느니라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연약함을 깊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세요. 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다 겪으셔서 실제로
우리의 형편을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왜 외로운지 아세요. 자신이 혼자고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주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내 아픔과 좌절과
절망을 누가 알아 줄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을 알아주고 그렇게 깊이 치유해 주며 함께 아파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신다고 하세요. 그것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우리의 연약함에 동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이 되셨고, 가장 가난한 말구유로 오셨고,
인간의 모든 고초인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핍박과 번민을 친히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현재의 연약함을 함께 나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을 하나님께 중보하심으로 우리로 승리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제사장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게 있는지 아십니까? 로마서
8:34절 이하를 기억하시죠?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자! 이 중보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능력이요,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 를 위해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나님의 귓전에 올리심으로 그 기도 때문에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누구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대제사장이신지
모릅니다. 누가 우릴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겠습니까? 우리 주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대제사장 사역을 하십니까? 다윗은 이것을 예언했는데
사도행전 2:34,35절을 보세요.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여기서 "주께서 내 주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네 원수로"에서
내가는 하나님이시고, 네 원수는 사탄입니다. 그 사탄을 예수님의 발등상
곧 보좌 앞에 있는 발 받침대가 되게 하기까지 곧 완전히 사탄을 제압하는 그날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서 대제사장 사역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전히 사탄을 제압하고 영원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시는 그 날까지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임금과 구주와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오른손을 높이 드사 임금과 구주로 선포하시고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행2:33을 보세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 우리의
집을 예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1
∼3을 보세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세 번째 사역이 바로 우리가 살 영원한 집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 집이 다 준비되면 다시 데릴러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결코 재림을 잊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살집을 다 준비해 놓고 데릴러 오는 것이 재림인데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성도를 두려움
가운데 처하게 하면 그것이야 말로 사탄에게 미혹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재림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성도는 오히려 재림을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종말을 무서워하는 자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기도하고 계시며,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온통 저와 여러분을 위해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3.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승천하셔서
하시는 사역에 대한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14b) 어떤 환경, 어떤 어려움, 어떤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있는 또 다른 것을 붙 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 하셨습 니다.(14,15)
우리에게 여전히
연약함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 연약함을 능력으로 바꾸실 큰 대제사장이 계시고 그 분이 하시는 이 사역을 굳게 믿고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4:1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라 진노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그 앞에 감히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라 진노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그 앞에 감히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물 되시고,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사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두려움 가운데, 주춤하는 가운데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던 그 은혜를 날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을 얻기
위해 언제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가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연약함에 은혜가 부어져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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