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십자가의 제단을 수축하라!
-왕상18:30∼40-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왕은 아합 이었는데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바알과 아세라 곧 우상의 백성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잘못된 아합의 결혼에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을 했는데 이세벨이
누군지 아십니까?
당시 팔레스틴땅 북 지중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는데 다른 이름으로 페니키아입니다. 이 페니키아는 지중해의 모든 나라들과 무역을
하면서 가장 부요한 나라가 됩니다. 당시 스페인 지역까지 진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역은 물건을 빠른 시간 안에 매매 해야만 더욱 부요해 질 수 있으므로 그 매매한 것을 빠르게 기록으로 남기려 하므로 문자가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알파벳의 기원이 페니키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 무역 을 하므로 늘 바람 신을 섬겼습니다. 바람이 불면 배가 잘 가기도하고,
비가 오고 파도가 높으면 위험해지므로 바람 신을 모시게 됩니다. 그 바람 신이 페니키아
말로 바로 ‘바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어진 다음에 북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여로보암이 친페니키아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일곱번째 왕인
아합시대에 최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두 사람이 가장 밀접한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 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과 문화와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이 이세벨을 맞이하자 페니키아의 경제적 이익이 들어옵니다. 문화가 들어옵니다. 풍요 로와 집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여름별장, 겨울별장을 짓고 심지어 상아궁도 짓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바알을 들여와요. 비의 신이 들어오니 가나 안의 토양과 딱 맞습니다.
가나안 땅은 거의 광야지대인데 비만 제 때에 오면 옥토가 되고 온갖 과실류를 맺습니다. 그러니 바람신 곧 바알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가정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게 되자 가뜩이나 북 이스라엘 백성 들이 신앙이 흔들 리는데 완전히 풍요의 신 바알에게 빠져가고 말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가정 마다 하나님의 제단은 무너지고 바알의 제단이 세워지는 것이예요. 바로
엘리야의 시대가 이런 상황이었습 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가정 제단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풍요 의 신,
물질의 신을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풍요를 위한 수단
으로만 모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잘못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데 실상은 바알을 섬길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아합시대에 하나님께서
3년 넘도록 비를 안 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을 괴롭히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예요. 누가
하나님이신지? 바알이 하나님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이신지를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가정마다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갈멜산의 영적 전쟁을 통해 우리 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머뭇 머뭇 하지 말라 (21)
엘리야의 시대는 고난의 시대였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3년 반 동안 아무 수입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3년 반 동안의 수입을 다 손해 보았다고 하면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시대가 엘리야 시대입니다.
사실 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가서 3년간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게 하셨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아합 왕과 그 부인 이세벨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에 하나님은 그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3년 반이 지나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갈멜산으로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를 주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21절을 보세요.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3년 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달라고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무려 85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 또한 바알에게 수 많은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밤에 이슬하나 내리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의
신인 바알은 비의 신, 풍요의 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바알이
비를 내려서 자신들이 풍요롭게 산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가나안의 신과 문화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바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비를 안 주시는 것입니다. 과연 가나안의 바알이 하나님인지,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 하나님인지 택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모시고 사는 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비가 내리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을 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아합도 엘리야를 죽이려고
날마다 찾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 보았 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수결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백성들이 머뭇 머뭇거립니까? 다수결에서 지기
때문입니다. 여론에서 밀리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850:1에서 850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엘리야는 “너희는 많으니”(25) 라고 하지만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지만 그는 다수가 없는 생명을 걸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르는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믿음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는 타협하는 자가 아니 었습니다. 주저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기억하시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이 결단이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라 (30)
갈멜산에 모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는 송아지를 제물로 잡고 각각 자기의 신께 기도하므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증명하는 영적대결을
벌립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송아지를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들에게 응답해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없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규례를 따라 자기
몸을 자해하며 피를 내고 미친 듯이 뛰놀며 외칩니다. 그러나 정오가 되어도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엘리야는 모든 백성을 가까이 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30)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엘리야는 불을 내려 달라고 하기 전에 여호와의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이 순서임을 이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진정한 제단과 제물됨 위에만 불로 응답하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단은 무너지고 바알의 단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그리고 머뭇 머뭇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야곱의 열 두
아들 곧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해 제단을 다시 수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 합니다. “이 야곱은 옛적에 여 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31b)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길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 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건만 지금 이스라엘의 기도의 단과 예배의 단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무너졌습니까? 솔로몬 후기부터 북 이스라엘 1대왕 여로보암부터 7대왕 지금의 아합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솔로몬 시대에 부귀영화가 넘치면서 오히려 나라 차원의 제단이 무너지고, 각 가정의 제단도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다시
세워요. 그 옛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던 그 제단, 요단을 건너 길갈에 세웠던 그 제단, 다윗이 예루살렘에 세워 하나님께 예배했던 그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돌로 단을 수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을 세워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12지파를 대신하는 제물을 올려 드림으로 무너진 백성들의 믿음의 단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이 주는 풍요를 우상으로 삼았던 그 제단을 무너뜨리고 다시금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 깊은 마음을 보시고 그의 기도에 기쁨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여호와의 단이 무너져
있는 한 하나님은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 한 역사하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다시 수축하십시오. 다시 여러분의 가정을 성소로 회복하십시오. 식구의 수효 대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의
무너진 단을 다시 수축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LWC공동체의 가정마다 여호와의 단이 세워져 예배가 회복되는 역사가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라 (32)
32절을 보세요.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할 때 한 가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열 두 돌로 제단을 쌓을 때도 여호와만 의지하며 돌을 옮기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종자 약 15리터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때도 오직 주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단 위에 나무를 올리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그 위에 놓을 때도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세 번 부으라고 할 때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드디어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가득차게 되었을 때도 주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엘리야가 드리는 제단이 형식적인 예배, 두 마음을 품은 예배가 아니 라는 것입니다.
그는 둘러선 사람을 의식하지도,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도, 심지어 최고 권력을 가진 아합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진정한 예배자였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의지한 여호와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 뜻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그는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한 것입니다.
잠언
3장 5∼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명철이나 지혜로 이 고난의 시대를 극복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를 인정함으로 이 영적대결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마저도 내어 맡겼습니다.
만약에 불의 응답이 없으면 아합이 죽일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생명마저도 드립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 진정한 예배를 이스 라엘에게 회복시켜 줍니다.
생명을 건 예배회복 이것이 엘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 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오직 생명을 건 예배 회복을 교회와 가정에서 다시 세워나가시길
소원합니다. 내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돌을 옮기고 단을 쌓을 때 하나님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심으로 예배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4.
언약의 하나님을 부르라 (36)
정오부터 시작된 제단 수축 후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는 드디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너무나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의 기도는 수많은 시간을 올렸어도 아무 응답도 없었지만 엘리야의 기도는 참으로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차이입니까?
기도의 양이 문제입니까? 물론 오래 기도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오래 기도하십시오. 오래 기도 할 수 있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바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은 없는 신이요, 그들은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찾기에 아무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소원만 빌 뿐입니다. 바알은 없는 신이요, 죽은 신이요, 만들어진 신이기에 아무 관계도 맺을 수 없으며 능력도 없어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오래 불러야 대답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한 마디면 "그래, 내가 여기 있다" 하시는 것입니다.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아는 것, 그것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빠! 아시지요?”
관계 속에서 기도하면 이미 다 아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엘리야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36)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의 이 한마디가 하나님의 심장을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아는구나!’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아브 라함을 선택하셔서 그에게 이 땅의 자기 백성을 구원 하시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세우 셨습니다.
이삭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야곱 곧 이스 라엘에게도 그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세 족장과 언약하실 때마다 꼭 따라서 주신 말씀이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 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 가운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언제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시길 기뻐 하셨 습니다. 그 호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약의 호칭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비전이 담긴 호칭 입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것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출3:5,6;눅20:37)
그러나 지금 엘리야 시대에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후손인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그 언약을 깨어 버리고 바알을 섬기고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제단을 다 파괴해 버리고 바알을 부르며 비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약의 의미도, 비전도 상실했습니다. 그저 비만 달라고 해요.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자기들의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엘리야가 이 언약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들은 이 언약을 다 잊어 버렸 고, 언약의
주체이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조차 다
잊어 버렸 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바로 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가 성경전체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 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36) 이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언약과 그것을 이루시는 과정 그리고 현재 타락한 이스라엘의 형편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꿰뚫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 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2"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의
여전한 하나님임을 저들이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저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단을 다 무너뜨렸다 할지라도 이제 종이 다시 세우오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이들을 되돌아오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하나님의 종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응답하시고 싶은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도에
하나님은 마침내 무엇으로 응답하세요?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8)
불로 응답하세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평생에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OO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렇게 불러보신
분이 계십니까? 바로 이 기도를 하나님은 지금도 그토록 기다 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아는구나! 언약을 아는
구나! 네가 엘리야처럼 아는구나’ 하시면서 너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이 무엇을 주시나요?
온 세상이 바알을 따라가도 너 한 사람은, 우리 한 가정은, 우리 한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외로운 길입니다. 두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결국 승리의 길이요, 방황하던
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우리 교회, 가정되길 소원합니다.
부모가 세상의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면 자녀들도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부모가 가정 제단을 생명처럼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 자녀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질 것입니다.
나갔다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되돌이키실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생명 걸고 무너진 십자가의 단을 수축합시다.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을 온전히 부르시길 소원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살아계신
주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제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성령의 불로 충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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