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19, 2014

JUN. 15. 14. LWC 주일강단 :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니까? 미6:1∼8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니까?

-6:18-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금 브라질에서 진행되는 월드컵에 참여한 선수들은 우승컵을 높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축구선수로써 그 만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다른 말로하면 인간의 영광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분들을 성공한 사람들이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최고조로 드러나고, 최상의 성취에 다다른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영광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영광은 썩어질 것이요, 사라지고 말것이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의 영광은 영원하여 썩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요, 세상의 영광과는 전혀 차원히 다른 세계의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13:44) 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늘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광 중에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 함께 사는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배하면 단지 주일예배로 생각이 멈출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배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주일에 모이는 예배를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예배에는 삶의 개인적 예배와 공동체로 모이는 공적예배가 있는데 이 두가지가 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영광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예배 드리는 자가 예배는 드리는데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원하시는 예배, 곧 하나님께서 날마다 자기에게 나오는 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이 문제가 해결되어지므로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시고, 만나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전능자와 동행하는 은혜가 넘치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1. 스스로에게 물어라

6절의 첫구절을 보세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지금 선지자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할까? 라며 고뇌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스스로 성찰하고 묻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미가 선지자의 이러한 자문은 우리에게 큰 영성의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그러면 왜 선지자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사실 미가 선지자는 시대의 질문을 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시대는 어떠하였습니까? 미가는 남쪽 유다의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사역했습니다. 이사야와 동일한 시대에 사역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주로 남유다에 대해 예언을 했다면 미가는 북과 남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미가는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을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그 땅에 있는 백성과 모든 것들에게 자세히 들으라고 선포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서 임재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1:2) 그러면서 미가는 심판이 임하는 원인을 말하는데 그것을 한 구절로 이렇게 말씀합니다.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1:5b)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유다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산당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가 선지자는 성전 신앙이 산당 신앙으로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의 진단은 매우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당은 전형적인 샤머니즘의 중심지며, 우상숭배의 진원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산당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33:52)

성전이 산당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산당이 되었다는 것은 신앙의 기복화, 세속화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영적지도자들의 무당화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짓 지도자와 거짓 성도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은 자신의 복을 위해서만 신적 대상에게 구하는 것으로 철저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드리고, 모든 종교의식도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미가는 자기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 신앙을 떠나 산당 신앙으로 타락한 것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도 자문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지금 미가 선지자는 과연 하나님께 무엇으로 나아갈까? 송아지로 나아갈까?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으로 나아갈까?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기뻐하실까? 내 죄를 위해 내 아들을, 내 몸을 드릴까? 과연 이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까? 고뇌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대표적인 선지자가 18명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참으로 자기 시대를 끌어 안고 고뇌 하는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선지자가 하박국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 입니다. 하박국의 고뇌는 악인이 의인를 이기고 압제하는 것에 대한 고뇌였습니다. 곧 외적문제에 대한 고뇌였습니다. 반면에 미가는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의 고뇌였습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께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께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는 바로 미가의 고뇌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전 일제시대나 공산치하의 고난 때에는 하박국의 고뇌가 알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미가 선지가의 자기 성찰의 고뇌가 타락한 이 시대의 산당 신앙을 다시금 성전 신앙으로 회복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이 자기 성찰의 거룩한 고뇌가 저와 여러분 바로 우리 교회 안에 있을 때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고뇌가 우리 안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정의를 가지고 나아가라

바로 이 고뇌의 질문에 대해 미가는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그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6:8a) 그것은 세가지입니다.

먼저는 오직 정의를 행하며(6:8b)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정의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의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정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곧 정의의 삶을 살면서 그 정의의 삶과 그 열매를 예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정의가 없는 삶을 살면서 아무리 일 년 된 송아지를 드리고,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삶과 상관없는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데체 미가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까?

3:1을 보세요.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나라의 지도자들의 본분이 정의를 알고 정의로 통치하는 것인데 이들이 정의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9절에서는 그들이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들이 정의를 어떻게 미워했습니까? 3:2절 이하를 보세요. 지도자들의 죄를 말합니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3:5에서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말합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거짓 선지자는 밤을 만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에 정의가 사라진 것처럼 남유다는 어떠합니까? 10절 이하를 보세요.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 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나라의 통치자들과 선지자들, 제사장들이 이처럼 타락한 시대가 미가 선지자 시대였던 것입 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세요.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겠다고 하십니다.(3:4)

그리고 결국은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 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가는 이처럼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참 선지자로서 고뇌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타락할 때 그는 홀로 고뇌하며 결단합니다. 어떻게 결단하는지 아세요?
3:8절을 보세요.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고 해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진다고 했습니다. 소위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세요? 가장 영적인 것처럼 말하는데 삶에 정의가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덮고 오히려 돈을 위해 점을 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재앙이 없고 평강만 있을 것이라고 미혹합니다. 그러나 미가는 달랐습니다. 미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어 그 시대의 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요? 그것만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지금 세상에 정의가 있습니까? 공의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물질을 주님의 자리에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성전 신앙이 산당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그것이 미가서를 기록하신 목적입니다. 고뇌하여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면서 바로 정의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고치고, 정의의 삶으로 예배 가운데 나오라는 것입니다.(6:10,11,12)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정의의 삶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세요.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부정한 저울을 썼느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라고 하세요.그러니까 거짓 저울추로 불의한 재물을 얻지 않는 것이 정의의 삶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의 나눔 가운데 은혜를 받은 것을 나누겠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저울을 속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게에서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루에 일정량을 가져갔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계산대를 더 두들겨서 매상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산대를 두드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말씀이 생각나서 한달간 고민하다가 결단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고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때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깨닫게 되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의 삶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삶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송아지보다, 천천과 만만의 제물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고, 그 이상의 은혜를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이 놀라운 삶의 예배와 공적 예배가 일치하는 역사가 우리 안에 넘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인자를 가지고 나아가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번째로 가지고 가야할 것은 인자를 사랑하며 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정의고 둘째는 인자입니다. 그러면 인자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먼저 인자는 히브리말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인자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헤세드는 성경에서는 주로긍휼’(mercy),‘자비’(kind- ness),‘선함’(goodness) 이렇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다 포함하는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언약적 사랑」(covenant-love)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 사이의 사랑을 바로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선하심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헤세드를 사랑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실 때는 막연한 사랑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 언약에 기초한 확고 부동한 사랑을 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도 철저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적 사랑으로 인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이라는 언약을 기초로 해서 늘 서로 아끼며 사랑하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해 수도 없이 말씀하셨고 실천하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미가 시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 헤세드를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은 헤세드를 통해 모든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그들은 그 헤세드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미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에게 나아올 때 송아지나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기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형식적인 제물이 아니라 진정한 헤세드의 사랑으로 나에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헤세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믿고, 너희들도 사랑의 마음으로 나에게 나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인 것입니다. 그렇게 헤세드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사랑하며 나오는 자를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요? 생명 걸고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의를 행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곧 헤세드를 사랑하세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책임지실 것입니다


  4. 겸손함으로 나아가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곡식이 무르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믿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더욱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 자신을 진단할 때 어느 순간 교만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증거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다시 겸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겸손의 마음으로 항상 너의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겸손으로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성도의 첫번째 덕목이 겸손이요, 두번째도 겸손이요, 세번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곧 겸비함 가운데 늘 하나님을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결국 베들레헴에서 다스리는 자 곧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곧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정의와 헤세드와 겸손이 하나님과 행하는 나라가 세워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소망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렇게 마칩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7:19,20)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버지의 날 예배를 드리면서 참으로 우리 LWC의 모든 아버지들이 이런 아버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진정으로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아내와 자녀들의 기쁨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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