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5, 2014

MAY.4.14. LWC 주일강단 : 삶이 된 십자가 (고후4:1∼12)


삶이 된 십자가
-고후4:112-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의 다섯번째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앞서 본 네 개의 십자가의 최종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와야 십자가를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고 된 십자가, 실현 된 십자가, 완성된 십자가, 선포 된 십자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보이시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삶이 된 십자가」 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와 현대교회 아니 우리 자신의 신앙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삶이 된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는 최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를 보세요. 교회마다 건물을 짓고, 예배당 밖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를 달아 놓습니다. 본당을 크게 짓고 본당 앞 강대상 위에 십자가를 걸어 놓습니다. 그렇게 건물에는 십자가를 달아 놓는데 정작 우리 목회자들의 삶에는 십자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요. 장로의 삶에도 십자가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교회를 다니는 성도의 삶에도 십자가 보기가 쉽지 않아요.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예요.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의 숙제예요. 이것은 영적 심장병에 걸린 것인데 이 문제 해결하지 않으면 다 죽어요. 중증 심장병인데 외상처럼 여기고 대충 치료하면 다 죽는 거예요. 정신 차리고 이것을 봐야만 해요.

한국에서 섬겼던 교회중 한 교회가 대리석으로 예배당을 너무 잘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참 건축 중에 건물 꼭대기에 약 15m되는 거대한 철재 십자가를 올려야 했는데 담임목사님이 출타 중이었어요. 그래서 건축회사 분들이 오늘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도해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그 십자가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고 올렸어요.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한국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가 됐어요. 세월호처럼 침몰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받고 낙심하고 전도의 문을 막았어요. 제 젊음을 다 바쳤던 교회에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교회가 소위 제자훈련하는 교회예요. 한국에서 가장 양육을 잘한다고 소문난 교회였어요. 그런데 지금 심각해요.

그보다 더 큰 강남에 있는 교회도 더 제자훈련 잘 시키고 한국교회의 자랑이었던 교회였어요. 그런데 지금 상상할 수 없는 빌딩을 짓고 종탑을 높이 세우고 십자가를 그 위에 올려 났어요. 지하철 타고 내리면 교회 앞마당으로 나가게 되어 있데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 건물보고 지나가면서 웃어요. 조롱해요.

여러분 도데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처참한 한국교회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적 한센스병에 걸린 것이예요. 손마디가 썩어 나가고, 심장이 썩어 들어가는데도 감각이 없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소위 제자훈련을 하는 내노라 하던 교회들이 도데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확히 진단해야 정확히 처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훈련하던 교회들이 그러니 제자훈련하지 말자고 해야 할까요? 아니지요. 제대로 더 잘해야지요. 문제는 제자훈련이 예수님의 제자훈련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철저히 삶이 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예요. 교회가 죽는 것이예요. 그래야 진정으로 사는 것이예요. 그래서 나도 지고간다. 너도 지고 와라 그러시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삶이 된 십자가예요. 그런데 제자훈련이 잘못되면 십자가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저 십자가는 지식적으로 알고 선포하는 것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데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십자가를 놓치니 죽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죽을 이유도 없어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그저 제자훈련이 문화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훈련하지만 문화 정도로 머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정말 십자가가 삶이 되어야 해요. 선포된 십자가로 만족해서는 안되요.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멈추어 있으면 안돼요. 십자가로 살아야만 해요. 여기까지 가야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이 된 십자가」를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1.  바울의 추천서가 진짜 입니다.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바울은 이 직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받은 직분이 무엇입니까? 사도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자신의 사도의 직분에 대해 변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에다가 유대교의 구원론인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 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후 교회마다 따라와서 바울이 없을 때 바울의 사도직도 바울의 구원론도 잘못됐다고 말씀을 혼잡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유명한 사도들의 추천서를 갖고 오는 것입 니다. 당시 유대인 여행자들은 유대인 가정에서 그들을 신뢰하고 숙소를 제공해 줄 수 있도록 추천서를 갖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이 그 사도들의 추천서를 악용하여 바울의 사도직을 흔드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추천서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추천서가 있는데 바울은 없으므로 자기들이 진짜고 바울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무너뜨리려고 합니까? 바울의 사도직이 무너지면 그가 전한 복음도, 그가 세운 고린도 교회도 다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고린도 교회가 무너지면 바울이 3차 선교여행하는 동안 세운 모든 교회가 다 무너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궤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후서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 아니 거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사도직을 변증하는 맥락가운데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31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보세요. 바울은 그들처럼 추천서가 필요없다고 합니다. ? 그렇습니까?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 했어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고린도 공동체 자체가 바울의 추천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자기 마음에 썼고, 그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보아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헌신과 사랑과 섬김이 녹아들어 있어 명백히 그 자체가 바울이 진짜 사도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추천서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 하나님 앞에서 /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잘 보세요. 바울이 여기서 자신이 진짜 사도됨을 6가지의 내용으로 증거합니다. 첫째는 숨은 부끄 러움의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둘째는 속임 곧 거짓으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째는 오직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 깨끗한 것입니다. 바로 이 여섯가지가 바울이 진짜 사도라는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 바울 뿐이겠습니까? 이 시대의 목사와 성도 모두 이 여섯가지를 스스로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가짜가 있으면 뽑아 버려야만 합니다. 진짜는 계속 살려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2.  메신저가 메시지입니다

5절을 보세요.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여기서 바울이 복음 전파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잘못하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갖고 있는 우리가 복음은 뒷전에 두고 우리 이름을 내기가 쉬워요. 이 유혹이 커요. 그래서 복음보다는 교회를 브랜드하고, 교회 이름을 내고 목사 이름을 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물론 교회를 사랑하고 소개해야 하지만 그것이 본질보다 앞선다면 이미 타락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미 이것이 유혹이 됨을 알고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전파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를 말하고 있어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 곧 로드십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파의 핵심이지요. 곧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므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주이심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가지 전파를 추가하여 말합니다.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주 되시고, 바울은 종이 된 것을 전파하는데 누구의 종이 된다고 하였습니까? 너희의 종이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요, 메신저가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아무리 좋아도 그 메시 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더러우면 그 메시지를 사람들이 받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주 되심의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전파하는 자신은 그 메시지를 받는 자들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삶이 거창한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 그 안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반대로 저와 여러분이 물건을 살 때도 나타나야 해요. 무엇이 나타나야 합니까? 주인이신 예수께서 친히 종노릇한 모습, 죽기까지 복종하신 십자가의 낮아지신 모습이 그 자리에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는 잘 다니고, 교회 안에서는 열심을 다하는 장로님, 집사님인데 물건을 살 때 너무 깍아요. 너무 까다롭게 굴어요. 손님이 왕이라며 군림하는 태도로 반말을 하면서 비인격적으로 대해요. 그러면서도 어느 교회 나가냐고 하고 우리 교회 오라고 해요. 여러분! 차라리 교회 얘기는 안끄내는 것이 그나마 하나님께 누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교회 얘기는 한 마디도 안하는 데 정말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해요. 그리고 스스로 낮은 마음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건을 사고 팔아요. 손님을 그렇게 대해요.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도 동일한 섬김의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이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 알게 되요.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모습이 어떤 삶이예요? 바로 「삶이 된 십자가」로 살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빛의 삶이라고 했어요.(6) 우리 LWC성도들이 이런 삶을 사셔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 선포 된 십자가가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과 빛이 삶인 것입 니다.
  

   3.  약함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7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비유가 있어요.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빚은 그릇입니다. 보배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우리 속에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심히 큰 능력이 우리 질그릇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는 능력을 예수님에게서 안 찾아요. 나의 지혜, 실력, 아이디어, 나의 소유 이런 것으로 능력을 삼아요.

지난 주간 강소교회 세미나에 참여 했어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모여서 작지만 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대형화의 그늘과 폐회가 심각해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이 모여 교회를 강하게 세워나가자는 취지였습니다. 교회를 분립개척하는 비전도 나누었어요. 여러가지 좋은 의견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제 마음 가운데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강해지고 싶어하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도데체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느 정도 성도 수가 있고, 헌금이 나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을 우리가 강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물량화하고 수량화해서 그것을 쟁취할 수 있는 능력이 강한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예요. 잘못하면 사이즈만 작을 뿐 잘못된 대형교회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감사하게도 목사님 한 분이 십자가 말씀을 하는 것이예요. 십자가만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이요. 십자가만이 능력임을 설파하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질그릇에게서는 능력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 나타나고, 무엇인가 이룬다면 우리가 교만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그 교만에 의해 결국 다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곧 우리의 약점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연약함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박해를 받습 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런 상황을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약함을 인정하고 내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나를 깨어드리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수많은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강점으로, 장점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메시지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경의 메시지는 네 약점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사실은 강소교회 보다는 약소교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말이 교회가 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라질 정도로 약함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질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자임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깨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의 진정한 큰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질그릇의 강점, 장점마저도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거기로부터 무엇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12장에 가서 말해요. 그의 장점과 강점이 무엇입니까?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말할수 없는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했어요. 신약성경 27권중 반에 가까운 13권이나 썼어요. 그의 손수건을 병자에게 덮으면 병이 나았어요. 많은 은사를 가졌고,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했다고 했어요. 수 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세계 선교의 장을 열었어요.

이것이 바울의 강점이요, 장점이예요. 얼마든지 이런 것을 자랑하고 이런 것으로 일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2 7절 이하를 보세요.

여러계시는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여 하심이라 /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질그릇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능력 가운데 무엇이 나타나길 원하십니까? 내 능력이 나타나 무엇인가 이루면 자만과 교만에 빠져 결국은 패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면 달라요.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까?

육체의 가시에, 내가 떠나 보내고 싶어서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나의 약점,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아픔, 상처,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라고 하셨어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어요. 그토록 없애달라고 간구하는데 안 없애 주시면서 그것이 은혜라고 하세요. 바울은 처음과 두 번 기도 할 때까지는 그것이 왜 은혜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세 번이나 간구한 것이고, 하나님은 세 번째 간구 후에 그 가시가 있는 것이 바울을 살리고, 바울을 겸손하게 하며, 바로 그 가시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후에 바울은 자기의 여러 약점을 오히려 자랑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욱여싸여 있는 것을, 답답한 일을 만난 것을, 배고프고 궁핍한 것을, 박해와 곤고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해요. 왜 그래요? 그 약해 보일 때가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고 가장 강할 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후13 4절에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우리의 영성은 바로 이 약함의 비밀에 늘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이 삶이 된 십자가의 비밀이요. 우리가 자만과 교만으로 부터 온전히 승리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고 바울도 바로 그렇게 살았어요. 우리도 십자가의 약함으로 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10절 이하를 보세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항상 죽음과 생명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 안에서 날마다 옛사람은 죽이면, 질그릇을 깨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죽음과 생명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이지요.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선포 된 십자가와 부활이 삶에서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항상, 항상 두번이나 말씀하세요. 언제나 모든 삶 속에서 순간 순간 죽음에 넘길 때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에 나의 옛 죄성과 성품들을 던질 때 예수 생명이 나타나 하나님의 큰 능력이 머물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죽으므로 예수 생명이 여러분 안에서 넘쳐나는 교회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강점과 장점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약점들, 우리의 가시들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지 않으시고 머물러 계신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그러나 우리의 강점과 장점에서 출발하지 않았기에 끝까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교회되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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