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사순절(四旬節,The Lent)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의 대속 사역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지내는 기간을 말합니다. A.D. 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 에서 제정되었고,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災)의 수요일(Ash Wendnesday)부터 시작하는 사순절로 철저히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역으로 계산해서 주일을 뺀 사십일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중에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이 은혜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만약 성경을 한마디로 정리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로 축약 됩니다. 그 정도로 십자가가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십자가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만큼
오해를 받는 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 들이 십자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조차 십자가를 오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십자가를 오해하면 그 오해한 만큼 신앙생활도 잘못 기울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르게 알고, 십자가의 삶을 살면 바르게 신앙생활하며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는 이번 고난주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먼저 성경이 십자가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가장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십자 가는 「예고 된 십자가」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는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지셨는데 그 예고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있었다는 말입니다. 곧 십자가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역사 속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 부터 십자가를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고 된 십자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이미 예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 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미리 예고 하심으로 십자가가 역사 속에 나타났을 때 본질을 잘 이해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고 된 십자가」를 통해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예고 된 십자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십자가에 대해
결정적으로 예고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고 된 십자가만 증거 하겠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 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9: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15:17,18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 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 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창49:11,12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해
붉겠고..
출12:21∼23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
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 피 속에 있어야 산다. 십자가 속에 머물라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출24:6∼8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29:20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출40:29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출40:34∼38
성막 완성 후 제물 드린 후에 행진 시작 :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전한 제물이
된 후에 임마누엘의 행진이 가능한 것입니다. 레위기는 전체가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와 출애굽기만 살펴보아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4,45)
여기서 ‘이것이라’ 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창세기 부터 구약의 모든
십자가의 예고 된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후에 제자 들이 성령으로 이 십자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결국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예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러면 십자가를 예고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역사 속에서 십자가를 친절하게 예고하고 계시지만 그 마음은 어떠 셨을까요? 여러분 세상의 예고는 홍보를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예고는 자기 아들을 죽이셔야 하는 예고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예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나요? 자기 아들을 죽이셔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셨나요?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해 보셨나요? 모태신앙인 형제가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저에게 “저는 35년동안 태어나서 이제까지 늘 교회에
다녔지만 십자가를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충격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너무 자기 중심적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을 죽이셔야 한다고 예고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저는 우리 한국말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아프셨을 것입니다.
아픈 것을 넘어 아마도 아리셨을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세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이 누구의 고백입니까?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시대보다 천 년 전에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이
22편에서 온통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어쩌면 그렇게 절절하게 예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지금 예수님의 입장에서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 예수를 완전히 버리신 것입니다.
멀리 하셨습니다. 돕지 않으셨습니다. 신음
소리에도 아무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어가는 아들을 향해 침묵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아무 능력이 없어서 침묵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건져내실 수 있음에도 버리셔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냉정하리만큼 버리시는 것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이처럼 심각합니다.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는 참으로 무거운 아프고, 아린 마음이신 것입니다.
한국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신문과 방송에 한
여자 중학교 화장실에서 중3 여학생이 아기를 낳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화곡동에 집사님 댁 심방을 갖는데 그 집사님은 홀트 아동복지의 위탁모로 미혼모들이 낳은 아기들을 입양할 때까지 돌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집에 아기들이 셋이 있었는데 집사님께서 저에게 하는 말이 “바로 저 아기가 며칠 전 중학교 3학년 학생이 학교에서 낳은 아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인생 가운데 내 아기는 아니 였지만 참으로 아린 마음을 느껴보았습니다.
저는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기가 태어날 때는 불행하게 태어 낳으나 이제 우리 집사님 품에 있는 동안 큰 사랑과 은혜로 부어주시고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참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렸 습니다.
얼마 전 우리 남한의 가족과 북한의 가족들이 상봉하는
짧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수십년 만에 만나 통곡하는 가족이 다시 헤어져야 할 때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때의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을 버리셔야 하는, 더 나아가 아들에게 죽음의 저주의 형벌을 내리셔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2절을 보세요.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아들이 낮과 밤으로 부르짖는데 아버지는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응답 이예요. ‘아들아 네가 죽어야 저들이 살지 않니? 아들아 너는 내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자다’ 그렇게 아파하시고, 아리시면서 침묵으로 응답하신 것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 안에서 「예고 된 십자가」 사건과 그 속에 담긴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느껴지시는 은혜 가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서 사는 근원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처럼 ‘아프시고, 아리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예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는 반드시 처 리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또한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죄는 결코 하나님과
공존할 수가 없습 니다. 죄가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십니다. 죄는 조금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죄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세요. 죄가 조금이라도 있는 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다 하시고 흰 옷을 입혀 주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우리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죄 사함 받은 의로운 상태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예요.
성경에서 천국을 처음 소개하는 장면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옵니다.
또한 천국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이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시편 97편
2절에 보면,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라고 말씀하세요. 보좌는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기초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의와 공평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세상은 이렇게 의와 공평을 기초로 창조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의와 공평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이 의와 공평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불의하고 불공평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고 된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어그러진 불의와 불공평을 송두리째 뽑아 내시고 완전한 의와 공평의
나라 곧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리고 아린 사랑의 마음과
죄는 반드시 처벌하시는 의와 공평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하여 나타난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시려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무한한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바로 그 나라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4. 예고대로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이처럼 「예고 된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사랑과 공의라면 그것을 친히 실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다르다면 절대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워 보셨고, 또 키우시고 계시지요?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하고 삶의 혜안을 갖은 부모의 마음을 자녀들이 이해하고 받아 들이며 동일한 마음으로 화답한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복된 부모 이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이 그렇게 마음이 같기가 쉽지 않습니다. 각각의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각각
다른 인격체로 존재하시지만 동일한 마음으로 서로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는 최고의 관계성 가운데 계십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자로 십자가에 죽임 당하게 하시려고 보내시는데 예수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어떻게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들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성경적으로 정확히 말씀드리면
‘창세 전’ 입니다. 엡1:4,7을 보세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현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미 세상을 창조 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인간 창조와 타락과 십자가의 구속을 한 마음으로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자 마자 십자가의 구속을 예고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바로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1,4,5)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곧 ‘영광’을 지금도 갖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창세 전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졌던 ‘영화’, ‘영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제 그 영광의 때가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이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에
한 알의 밀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12장 28절에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자, 정리하면 세상을 창조 하시기
전 곧 창세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의 영광에 대해 함께 나누셨고, 이제 그 때가 이르러
십자가를 통해 영광이 나타나게 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 님은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십자가가 영광이 됩니까?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언제 영광이란 단어를 씁니까? 나의 존재가 최고조로 나타났을때 우리는 영광스럽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언제 영광 받으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나타나셨을때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바로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 무한하신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마음이 있으세요. 그래서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하시고
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억하시지요? 마26:38,39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 12장 27절에서도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사실 이것이 최고의 순종인 것입니다. 창세 전에 의논하셨고,
창세기부터 그토록 예고 된 십자가 였지만 예수님앞에 십자가가 닥치자 예수님도 매우 고민이 되셨고, 마음이 괴롭다고 하셨고,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이 괴로운 마음을 이미 천 년 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어요. 시 22편 6절부터 보세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처럼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잔이 막상 닥치자 아버지께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솔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심으로 결단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철저히 성경에 예고 된 대로 살다가 죽으심으로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갖어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 지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래요? 십자가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온전히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지므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나의 체면, 나의 자존심, 나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십자가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제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이처럼 아프고 아린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공의, 영광의 역설로 「예고 된 십자가」를 예비하셨나요?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이 아니라 벌레처럼 되시고, 사람의 비방 거리와 조롱
거리가 되셨나요?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둘러쌈을 당하시고 물같이 쏟아지시며 속이
다 녹고 혀가 말라 입천장에 붙으며 수족이 찔리셨나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입니다.
창세 전에 예비하시고 구약 역사 내내 「예고 된 십자가」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공의와 은혜가 우리의 삶을 영원토록 지배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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