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간 고난 주간은 예전의 고난 주간과는 좀 달랐습니다. 물론 새벽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행적을 따라가며 묵상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국에서 어린 학생들이 당한 아픔과 가족들의 절규를 듣고 보는 것이 참으로 참담한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바다같은 어른들의 욕심과 죄악이 우리 자녀들을 차가운 바닷 속에 잠기게
한 것 같아 너무나도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생명보다 귀한 아이들을 잃고 탄식하다
못해 혼절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자기 아들에게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쏟아 부으셔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슬픔에 빠져있는 분들을 위로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이 얼마나 소망이 되고, 부활이 얼마나 위로가 되며, 부활 만이 인간의 모든 아픔과 좌절과 탄식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은혜임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이 시간도 배 안에 살아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있다면 반드시 살아 나오는 주님의 은혜와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고 된 십자가」와 「실현 된 십자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다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지만
완성되어야만 합니다. 실현은 성경에 예고된 십자가가 예수님을 통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완성은 그
예고와 실현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완성 되어야만 합니다.
「완성 된 십자가」 는 ‘십자가가 말 그대로 온전한 십자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가 진정한 십자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사역이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난다면 온전해 질 수가 없습 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십자가가 온전해 질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만이 십자가가 진정한 십자가가 되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이 십자 가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그러면 우리 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요, 우리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은
망한 자라고까지 했어요. 왜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4∼19)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대속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을 통해 십자가가 완성이 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증거하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은 두 가지를
예고 하셨습니다.
6절을 보세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천사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에게 이미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무엇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부활할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갈릴리에서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중에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한다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한 고백을 기억하시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세요. 정확한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하십니다. 곧 신앙고백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되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로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나타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6:21)
예수님께서 드디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또한 마17:22절에 보면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예고 입니다. (막9:30-32,눅9:43-45) 바로 이 말씀이 천사가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20:17-19절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는 길에 열 두 제자에게 따로 말씀하세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막10:32-43; 눅18:31-34)
이것이 세번째 예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세 번씩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예고 하셨는데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 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라는 신앙고백 다음부터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인 자신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의 미래 모습을 오해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려고 해요. 그러면 그 신앙고백과 다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심으로
진정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대속하고, 다시 사는 다른
차원의 구원을 몸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입니다.
무덤에 찾아 온 여인들에게 천사는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이 여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했습니다.(눅24:8)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부활을 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반응을 11절에서 보세요.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예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직접 세 번이나 들은 제자들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이 인간의 상식과 차원을 뛰어넘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보기는 보았는데 그 의미도 몰랐고, 더욱이 부활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 그룹 가운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있었는데 사두개인은 영도 부활도 안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둘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겠다고 하면 그것은 사실 십자가도 못 믿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와 부활을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한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 번이나 고난을 예고 하실 때 십자가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와 삼일 후에
부활할 것을 함께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왜?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로 말씀하셔요?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는 그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한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활 하셨기에 십자가의 구원이 온전해지고, 완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됨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삶에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3. 고난 이후에 영광이
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못했던 자들에게 좀더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십니다. 26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 을 받고 자기의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고난과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는 고난이요,
부활은 영광이라고 해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뿌리요, 하나임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면서 순서까지 분명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 보다는 영광을 좋아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고난을 좋아하고 영광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부활의 영광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라요. 아니 우리 생각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을 보세요. 얼마나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작은 영광에도 그저 높아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부정하시고, 자기를 죽이시는 것을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시므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도 먼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사실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여도 얼마나 받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 미국에
살면서 복음으로 인해 받은 고난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기꺼이 성도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교회와 성도를 위한 자기 부정이요, 자기 희생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0-12)
그는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려 했고,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영광을 맛보려고 애썼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푯대라고 했어요. 그 부활의 영광의 푯대를 향해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부활의 결과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임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부활의 한 없는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가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4. 십자가와 부활이 믿음으로 하나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여인들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실의에 빠져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 이들과 약 7마일 정도를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때 두 제자는 어찌 최근에 예루살렘 있었던
일을 당신만 홀로 모르냐고 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5,26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들을 보세요.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고
많은 분들이 또 한사람은 바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당시 상황을 보세요.
본인들의 입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슬픈 빛을 띄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내 입으로 말하는데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를 책망하셨어요. 하나는 ‘미련하다’고 하셨고, 하나는 성경을 ‘더디 믿고 있다’고 질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글로바는 잘 몰라도
누가는 잘 알아요. 누가는 당시에 의사였습니다. 전문인입니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련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원뜻은 ‘어리석다’, ‘이해하지 못한다’, ‘센스가 없다’
이런 의미입니다. 두 사람이 세상에서는 똑똑한지 몰라도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며, 믿는 데는 어리석고 더뎠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서 결코 말씀이 살아 역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 지식과 믿음으로
받아 들임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는 말하는데 내가 어리석고 내가 믿음이 더디면 전혀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떠나지 않으세요.
7마일을 거의 동행하세요. 왜 동행 하십니까?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세요.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동행하는 내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성경에서
자기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동행의 목적이셨어요. 몇 시간 내내 성경을 풀어 주셨어요.
그리고 그들을 떠나 가시고 그들이 예수님인 줄 깨달았을
때 어떻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32절을 보세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기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는 ‘성경을 온전하게 열어(설명) 주실 때’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뜨겁다”는 말은 ‘카이오메네’ 란 말인데 수동태, 현재 분사로 ‘계속해서 불타 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우리가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십자가도 목격했고,
부활의 소식도 들었던 자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다 보고 들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냉냉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 습니다. 믿음이 더뎠다고 했습니다. 의미도 몰랐고, 이해도 못했으며,
믿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불이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잠깐 붙고 만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스스로 뜨겁게 된 것이 아닙니다. 수동태예요.
누군가에 의해 뜨거워진 것입니다. 마치 마른 장작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33절 이하를 보세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 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성경이 온전히
열리고,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확증을 받았기 때문에 불이 붙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이예요. 그 결과가 어떠해요? 곧 그 때로 일어나… 돌아가 보니
자기들의 목적과 스케줄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예루
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불타면서 더 이상 엠마오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의 목적과 스케줄이 그들을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그들을 이끌어 갑니다. 마음의 뜨거운 불이 그들을 인도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심령에 불이 붙으면 인생의 진로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 처럼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말씀을
자세히 배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확신 하게 될 때 마음에 성령의 불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성경이 열리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뜨겁게 성령으로 불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감사하게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풀어 가르칠
때 이렇게 불타는 역사를 은혜로 보게 하셨습니다. 종은 제자훈련이 예수님이 하신대로 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세히 성경을 가르치면 십자가와 부활의 불이 마음 속에서 뜨겁게 활활 타올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오순절을 통과해야 합니다. 위로
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부활은 생명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이고, 부활을 통해 우리가 다시 살 것을 첫 열매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시작이라면 부활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주신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 거룩한 아침에 부활을 통해 「완성 된 십자가」의 불이
저와 여러분 속과, 우리 공동체 안에 활활 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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