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와 유대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도시인 예루살렘에는 아마도 유대 전통에 의해 매년 절기마다 방문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몇 차례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500여년 전에 사역했던 스가랴 선지자는 (B.C.520년,슥9:9)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9:9)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크게 기뻐하라”, “즐거이 부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왕이 너희에게
임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크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왕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당시 황제들하고 좀 다릅니다.
당시 로마
황제들의 입성은 화려함과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황제가 나귀 새끼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힘있고 잘생긴 백마를 타고, 군대의 호위
속에서 나팔소리와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많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하하하’ 하고 비웃을 모습이요,
나귀 새끼를 탔다고 조롱 받을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가랴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고 예언을 하였고,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그대로 하셨습니다.
나귀새끼를 구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눅19:31)
‘주’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와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입성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왕께서 군림하러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러 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황제의 입성식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자신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순간이 다가 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셔서 왕이 되시 면 서로 좌우정, 우의정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소위 3년을 예수님께 직접 제자훈련 받은 자들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주간의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세상적 원리, 세상적 가치를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고
된 십자가」를 「실현 된 십자가」로 이루시고자 들어가시는 것이예요. 오늘은 지난 주의 예고 된 십자가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증거하겠습니다.
1. 자기를 온전히 맡기신 예수님
17절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여기보면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16절에 보면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고 했습니다. 곧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예수님을 맡은 자들은 소위 ‘사탄의 회’(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탄에게 완전히 넘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창3:15) 그 예언이 실현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맡은 사탄의 무리들을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는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들을 따르는 군중들, 그리고 로마의
장교들과 군병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고, 얼굴에 침을
밷고, 얼굴을 쳤다고 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다
취하여 제비뽑아 가졌습니다. 군중들은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는 예언대로 벌레요,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그 때 어디 있었는가?’ 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찬송가에도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종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습니다. 그를 죽이라고 소리지르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면 교회에서 종교 생활만 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조롱과 비방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냐구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조롱하고,
비방할 때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 가의 예수님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조롱하고, 비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을 보지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알지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탄의 회에 완전히 넘기십니까? 바로 그들의 죄를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들의 죄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예수님을 자기들 방식대로 재단(裁斷)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를 흔들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모욕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막15:29)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그들에게 완전히 맡기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누가 자신의 대적에게 자기의 생명을 맡기겠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자신을 맡기심으로 오히려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역설적 십자가를 실현하셨습니다. 곧 십자가로 오히려 그들이 살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실현 된 십자가는 자신의 대적에게 자신을 맡기심으로 그들에게 오히려 살 길을 가르치시는 용서의 십자가요, 은혜의 십자가요, 파라독스의 십자가 입니다. 이 십자가의
깊은 은혜가 고난주간 내내 저와 여러분 안에 넘쳐나길 소원 합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17절을 다시 보세요.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구절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자기의 십자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진정한 제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고 반복하여 소화하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 모두 자신이 져야할 ‘자기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 가운데 십자가가 있기는 있는데 목걸이에, 자동차에,
반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차에 달고 다닙니다. 집안 벽에도 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상징물로는 많이 소유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의
십자가에 대한 묵상과 삶에 치열한 고민이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나가서 여기서 ‘자기 십자가’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경우 ‘자기 십자가’
하면 속썩이는 남편, 비뚤어진 아이들, 힘든
일, 문제 이런 것들로 생각합니다. 만약 자기 십자가를 그렇게만 받아
들이면 그의 삶은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 니다. 결국에는 너무나 이기적인,
자기 문제에만 매몰되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기가 막힌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 십자가입니다. 오해된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잘 살펴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자기 십자가’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입니까? 아니예요.
그러면 누구의 십자가 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십자가예요.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였어요. 그런데 누가 지십니까? 예수님이
지세요.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정확히 말씀 드리면 예수님은 ‘남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남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형통하고, 잘 되고, 아프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고…이런 것에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뚜렷합니다. 흐릿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지 않고는
도저히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이처럼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곧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슬픔,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철저히 받아 들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십자가를 자기의 십자가로 지고 묵묵히 해골이라는 골고다로 올라 가셨습니다. 곧 저와 여러분의 남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시는 ‘자기 부정’의 최절정을 「실현 된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
19,
20절을 보세요.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사실 빌라도는
정치적인 인물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서 패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이 쓸 것을 썼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후 가장 먼저 끌려 간 곳이 당시 대제사장의 장인 안나스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가서 심문을 당하십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대제사장 그룹이 예수님을 먼저 잡고 심문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잡은 이유는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보낸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저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빌라도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질문이예요. 그 때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되 물으십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유대인이냐?고 하면서 예수님께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심문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세요. 36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을 보세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빌라도와 유대교 그룹의 대화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종교적, 민족적인 그들만의 리그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은 아예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조차 인정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이단의 교주로
여기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 가운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고,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36,37)
자, 여기 진리와 비진리가 부딪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님이고 비진리는 빌라도와 유대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비진리가 파워가 있는 것 같아요. 비진리가 힘이 있어요.
그리고 당시에 서로 싸우던 빌라도와 유대교가 힘을 합쳐요. 비진리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진리를 대항하는 것입니다.(시2)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해요. 비진리는 이처럼 파워가
있어요.
그런데
진리는 고난과 조롱을 받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힘있는 파워 편에 섭니다. “진리냐? 비진리냐?”가 아니라 “힘이 있냐? 없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다르게 말하면 “진리냐? 비진리냐? 가 아니라 “돈이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는 세상의 파워와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요.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열리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현 된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완전히 담당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진정한 왕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오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진정한 왕으로 고백하는 자만이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진리에
속한 자 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진리, 오직 예수에 속한 자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주님과의 심문을 끝났고
빌라도는 단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패를 달고 말았 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현장에 있던 어느 로마 백부장은 무엇이라 고백하는지 아세요?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더라 라고 고백을 해요.
진리에 속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와 아닌 자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오직 영의
귀가 열려 진리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4. 다 이루신 예수님
3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7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운명하시기 직전 마지막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는 이 마지막 말씀이야 말로 구약에 수 없이 예고 되었던 십자가가 온전히 실현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의
영광을 함께 나누신 예고된 그 모든 계획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사명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원뜻이 “완불했다”, “다 갚았다”는 당시의 상업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곧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생명을
주심으로 다 값으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이
세상에서 누가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자기 생명을 대신 내어 줌으로 갚아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값치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곧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십자가를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이요, 자기 중심입니다. 그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생명도, 내 시간도, 내 물질도, 내 건강도 다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님의 것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과 십자가 이후의 삶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다름의 은혜가 매일의 삶에서 넘쳐 흐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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