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니아 랭캐스터에는
밀레니엄 극장이라는 궁전같이 멋진 공연장이 있습니다. 이 극장에서는 1년 내내 성경의 ‘천지창조,
노아, 요셉, 룻, 요나’등을 공연하는데 미국 기독교 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년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미라클 오브 크리스마스” 가 공연됩니다. 이 “미라클 오브 크리스마스” 공연을 몇 번 보았는데 매우 감동적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 장면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온 무대를
가득 매운 천사들이 천상의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잘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요한계시록의 천상의 예배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파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은혜를 받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셀수 없는 수 많은 생각이 결정적으로
실천되어지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이란 표현을 38번이나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것은” 이 표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왜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그 보내심에 왜 자원하심으로 순종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1.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1)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7)
말씀드린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것”은의 38번 중에 첫번 째 “나를 보내신 이” 라고 하신 것이 바로 오늘 34절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해요. 지금 아버지가 예수님을 누구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의 한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를
기다리시며, 누구를 맞이하고 계십니까? 가장 작은 자입니다.
가장 소외된 자입니다. 가장 죄인 취급 받는 자 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을
보세요. 언제나 한 영혼에게 마음이
가 계십니다. 한 영혼도 소홀히 대하지 않으십니다. 한 영혼이 주님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알아 주실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더욱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갖는데 실패하고 종교적 생활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메울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 편에서는 누구도 그 간격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오 셔서 그를 기다리시고 만나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2) 상한
심령에게 있습니다. (6a)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찾아 가셨을 뿐 아니라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 여인에게 더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니고데모도 사랑하십니다.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이 여인에게 더 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상한 심령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사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죄 가운데서 상처받고, 소외된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상징적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햇볕이 타오르는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왜 그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옵니까? 사람이 없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여인입니다. 사마리아인 자체가 소외된 상처있는 사람들인데, 이 여인은
그들 중에서도 상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소외된 영혼이요. 상처받아 외로운 영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꺼져가는 심령, 상한 심령을 지금도 찾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꺼져가는 심령, 상한 심령을 지금도 찾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3) 죄인에게
있습니다. (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사실 죄인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모든 죄인을 상징하는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찾아가셨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여인이 주여 그런 물을 주사 목마르지도 않게, 여기에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세요?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세요. 그 여인의 가장 아픈
부분을 의도적으로 끄집어 내고 계신 것 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영적 수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 대해 알아야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현상과 오해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만남에서 이 세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세요. 거기까지 보셔야
합니다.
먼저 죄에 대한 현상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겉으로 보이는
현상입니다.
죄의 현상만 보면 죄에 대해 오해하기 쉽습니다. 오해는 무엇입니까? 현상에 나타난 모습만 보고 이 여인의 죄를 단지 성적인 타락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왜 사마리아 여인이 첫번째 남편이후 두번째 남편 그리고
다섯번째까지 남편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살고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단지 성적인 타락만일까요? 아닙니다. 더 근원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여섯 명의 남자를 자신의 생수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지금도 홀로 사는 분들이 쉽지 않은 인생을 사시지만 당시에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성적 죄 이전에 의존적 죄가 더 문제입니다. 여섯 남자를 하나님 자리에 놓고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서 삶의 모든 것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여섯 명의 남자를 자신의 생수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지금도 홀로 사는 분들이 쉽지 않은 인생을 사시지만 당시에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성적 죄 이전에 의존적 죄가 더 문제입니다. 여섯 남자를 하나님 자리에 놓고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서 삶의 모든 것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것을 좀더 확대해서 말씀드리면,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문제란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의존하는 존재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 여인이 의존했던 남편이요,
남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욱 의존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욱 의존하는 여섯 남자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본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께 서 예수님을 왜 이 여인에게 보내셨는지 아세요? 그것은 결국 “내가 너의 남편이다”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예요. '네가 의존하고 의지할 존재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와 전혀 다른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아셔야만 합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살던 나에게 진정한 남편이 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뜻은 한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1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니라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심으로 나타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곧 생수 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선물이예요.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세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두 가지 악을 행했다고 하세요?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한 가지 악이나 마찬가지예요.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니 목마름을 해갈하려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식으로 말하면 6명의 남자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열심히 판 웅덩이가 결국 터진 웅덩이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는 전 생애를 두고 파고 붓고 애쓰고 수고하지만 터진 웅덩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한 인생입니까?
바로 이러한 형편 가운데서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한 영혼에게 찾아 오셔서 선물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물을 길러 왔지만 그 물은 늘 갈증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생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선물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생수의 강에서 모든 삶에 소생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 예배자가 됩니다. (23,24)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예배를 알려주십니다. 예배를 유수한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나 전문 음악가들에게
세미나를 열어 알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중에 죄인인 이 연약한 여인에게 가장 위대한 예배를 가르치십니다.
그뿐 아니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 프로그램 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나아가는 예배자 자신 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예배자를 기뻐 받으시는가?
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는가? 안
받으시는 가? 가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에 목말라 있던 이 여인에게
예배자로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예배자를 받으시는가? 내 자신이 곧 제물이 되는 예배입니다. 토미 테니는 다윗의 장막이란 저서에서 “언약궤 위의
그룹 시은좌는 금을 쳐서 만든다” 금을 조립하거나 주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디를 지성소로 삼아 임재하시는가? 내 인생의 휘어진 부분, 그곳을
쳐서 상처가 아문 그 곳을 임재의 처소로 삼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나의 의, 나의 공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나의 아픔, 고통, 휘어진 그 곳에 하나님을 모셔 그
곳이 치유되고, 그 곳이 하나님을 모시는 은혜의 보좌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곳에 임재하실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눈물과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2) 버린자가 됩니다. (28a)
(2) 버린자가 됩니다. (28a)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내가 의존하던 ‘물’을 버리고 ‘생수의 근원’을 갖은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돈’만 좇아가던 자가 ‘돈’과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가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라는 말도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순위가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여러가지 중에 우선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절대 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우선
순위에 두면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위치가 흔들리고 변합니다. 그러나 절대 순위에 모시면 내 모든 삶의
기준과 중심이 되셔서 우리 삶의 규모와 질서를 인도해 주십니다. 생수의 근원에서 생수가 흘러 넘치게 됩니다.
(3) 전도자가
됩니다. (28b)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르되”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숨어있던 여인’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전라도 신안 앞바다 증도에 가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순교한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 한국기독교사 기사에 의하면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 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 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 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다. 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바로 이 문준경 전도사님이 한 해에 고무신이 9켤레나 닳을 정도로
전도에 앞장서 신안 일대에 100여 곳, 그 중 증도에서 모두
11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그 가운데 한국교회에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9절을 보세요.
“여자의 말을 듣고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1 절은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42절을 보세요.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전도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LWC 모든 성도들이 이처럼 주님의
귀한 동역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4) 영적
배아자 됩니다. (35,36)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수 많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 보십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소외된 자들입니다. 35절을 보세요. “너희 눈을 들어 추수할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이 여인이 평생 무엇하며 살았을까요? 아마 일평생 사마리아의 수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예배자, 버린자, 전도자, 영적 배아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목록 곧 생수의 줄기인 것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상한 심령 한 사람을 만나시고,
회복시키는 것을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셨는가?
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기의 양식, 곧 밥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을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어 드리는 것을
자신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곧 상한 심령 한 영혼을 살려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우는 것을 밥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밥은 생명입니다. 세상은 돈을 밥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 살리는 것을 밥이요 생명으로 여기셨어요. 하나님께서 이것 때문에 보내셨고,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세요?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진짜 생명을 십자가에 드리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목사와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숨을 내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밥이요,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 갈 영혼, 상처와 아픔으로 숨어 사는 영혼들을 살려내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우고 예배자가
되며 자유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한 영혼을 보듬어 안고 예수님처럼 씨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상한 심령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예수의 제자로 세워가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그래서 ‘예배자, 버린자, 전도자, 동역자, 영적 배아자’로 변화되는 제자들이 쏟아져 나와 오직 이 마지막 시대에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몸 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제2, 제3의 사마리아 여인,
제2, 제3의 문준경전도사가 나오길 소원합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아버지께로 날마다 나아가 그 생수의 통로가 됩시다. 아버지의 마음과 상한 영혼들의 심령을 시원케 해드리는
교회가 됩시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순종하면 우리가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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