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를 하다보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겠는데 예수님은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신으로 믿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성인(聖人)으로
인간이 아니냐?”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신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털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이 시대의 사람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했습니다. 유대교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이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곧 하나님이란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이단 중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 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1:1∼4)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단지 선지자
내지 성인(聖人)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결과가 너무나 다릅니다. 전자는 자기의 죄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에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후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죄로 인해 죽으심으로 심판을 면하고, 죄와 형벌로부터 영원토록 자유케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 예수님과 사귀는 그 누림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사귐’ 이란 말은 ‘코이노니아’인데 ‘연합, 영적교감, 밀접한 관계(close
relationship)’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와 교제 곧 가장 밀접한 관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경험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사귐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그 사귐의 한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제자의 삶 가운데도 폭풍이 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예수 믿고 나서 삶에 문제가 생기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형통만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사실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는 하늘의 가치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을 내딛고 사는 세상은 땅의 가치가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서 겪는 영적 갈등과 고난과 역경의
파고가 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 모든 파고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립니다. 그것이 소위 진짜 형통입니다.
(1) 폭풍은 언제든지 올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37절을 보세요.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폭풍이 언제 왔습니까?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십니다. 자, 여기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가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께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큰 풍랑 이 왔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데도 큰 광풍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열 두 제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셨다는
것이예요. 무슨 말씀이예요? 예수님과 함께 가는데도 큰 광풍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저 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셨는데 저 편은 갈릴리 바다 건너
편 거라사인의 지방을 말합니다.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 곳에 가셔서 무덤 사이에서 살던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자 두 사람을 고치십니다.(마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실 때는 유람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영혼을 건지시러 가시는 것입니다. 곧 사명을 위해 가는데도
큰 풍랑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큰 광풍이 왔다고 했습니까?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 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가 완전히 침몰 될 정도로
큰 광풍이 몰아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 호수인데 평상시에는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남부 사막과 광야는 너무나 거친 땅이지만 북부 갈릴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호수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풍랑이 일어나는데 그 지형의 영향이 큽니다. 갈릴리 호수는 사방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북쪽 헬몬산의 차가운 바람과 호수의
따뜻한 공기가 부딪힐 때 갑작스럽게 큰 광풍이 일고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사명을 위해 가는데도 죽게 될 정도의 큰 광풍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폭풍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이처럼 큰 광풍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혼비백산이 되어 있습니다.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라고 외칩니다. 어찌보면 기도같은데 사실은 원망에 가깝습니다. 사실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처는 완전히 다릅니다. 3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성난 바람과 바다에게 꾸짖으시고,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놀랍게도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졌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와 완전하게
해결하시는 예수님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순간입니다. 성경이 이 대조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인간은 자연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단지 자연에 순응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연에게 명하셨고 자연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2. 폭풍을 통해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
자, 그러면 이 큰 광풍을 통해
몇 가지 드러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1)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바다와 바람에게만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40절을 보세요.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누구를 꾸짖고 계십니까?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무엇을 꾸짖으십니까? 무서워하고,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찌 믿음이 없느냐?”
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자 보세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데도 믿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믿음이 없느냐?’의 더 정확한 의미는 “어찌 아직도(of time not yet) 믿음이 없느 냐?” 란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시고, 나병환자도 고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을 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손마른 자도 고치십니다. 3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곧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질병과 귀신들 위에
계신 분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 들이 아직도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이 없다고 하시는 것인가?
(2)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는 것이예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이 적나라 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큰 폭풍이 오니까 그 폭풍 속에서 그들의 믿음의 상태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드러난 제자들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입니까?
35절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라고 말씀하세요.
4장 앞에는 아침에 바닷가에서 큰 무리에게 설교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10절 이후에는
그 날 오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침에 하신 설교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물 때에 건너 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제자훈련 할때도 말씀 드리는데 그 날 하루의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아침 설교를 통해서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후 제자훈련을
통해서 씨 뿌리는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현장 실습을 하시는 것입니다.
현장 실습을 해보니 제자들의 믿음이 낮에
했던 씨 뿌리는 비유에 등장한 네 가지 밭 가운데 어떤 밭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린다고 했습니다. 곧 씨는 말씀을 의미해요.
밭은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씨를 받는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네 종류의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길 가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돌밭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말합니다. 가시떨기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상시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믿음 상태를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볼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풍랑이 찾아오면 가라앉아
있던 믿음의 상태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제자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으로 드러난 것입니까?
돌밭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낮에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는 말씀을 배우고, 오후에 제자훈련도 받고 기쁨이
넘쳤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건너 가자”란 말씀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했음에도 불구 하고 큰 광풍이 오니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광풍은 제자들을 일깨 우는 최고의 훈련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풍을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 어떤 마음의 밭인지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좋은 땅이 되지 못하고 아직도 돌밭에 머물러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돌밭은 겉표면은 좋은 땅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흙을 걷어내면
돌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뿌리가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돌들이 무엇입니까? 굳어져 있는 내면과 잘못 형성되어 있는 생각과 사상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다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렇치 뭐,
예수님이 이런 일까지 하실 수 있을까?’ 이런 마음에 걸려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딱딱한 그릇된 돌들을 다
걷어내면 바로 좋은 땅이 됩니다.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왠만해서는 깊이 박힌 돌들이 뽑히지가 않아요.
그래서 건너 가자 하 시고 풍랑을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광풍이 불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미 중부지역에 토네이도가 오면 땅 위에
있는 것은 다 걷어 올라 갑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나니 제자들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사상과 생각과 잡념 과 상식과 고정관념들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큰 광풍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그 돌같이 굳은 생각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예수 님의 제자가 되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딱딱한 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제자들이 예수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38절에보면, “선생님이여”라고 해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당시의 율법교사들인 랍비중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좋은 하나님 말씀을 해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 정도로 안 것입니다.
41절을 보세요.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 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누구이기에” 라고 합니다.
누구신지 모른 것입니다. 누구신지 모르고도 따르고 있고, 순종하고 있고, 동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든지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심지어 훈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잘못하면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예요. 그저 종교생활, 종교 활동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결코 생명이 역사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가 반드시 발아되고 뿌리를 내려야만 줄기를 내고 열매를 맺는데 뿌리가 막히고
말라버리니 생명이 어떻게 역사 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을
그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대로된 믿음 의 사람들을 만드시고자 풍랑 가운데로 데려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심히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자신들의 모든 생각과 사상과 상식과 고정관념의
돌들이 다 뽑혀 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는 것입니다. 이제야 믿는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아! 예수님은 바로 바람과 바다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이
십니다!’ 라고 고백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령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관이 중요하다고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믿게 됩니다. 왜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께
순종했습니까?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요한복음 1장 1∼3절을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
되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배 고물에서 주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진정한 인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바람과 바다에게 명하시고 순종하였다는 것은 예수 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심판주요, 재림의 주이십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을 몰랐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두려워 떠는 것은 당연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풍랑
속에서 전혀 다른 대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풍랑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날 낮과 오후의
모든 주제가 하나님 나라 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물이 가득차고 비 바람이 몰아치고 사람 들이 비명을 지른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코이노니아가 있는 성도는 평안함
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큰 광풍을 만나지 않고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사건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큰 풍랑
만나지 않아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꼭 큰 풍랑을 만나야 믿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그렇게 믿는 것이지만 사실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 되도다 ”(요20:29)고 하셨습니다. 사실 경험하고 믿는 것도 좋지만 진짜 믿음은 경험이 없어도 보지 않고서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진정한 큰 믿음입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경험하겠어요.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체험하겠어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믿음이 자라는 차원에서는
‘씨’라고 비유도 하지만 말씀을 다른 것으로도 비유 합니다.
예레미야서 23:39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 하냐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에베소서 6:17b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 성령의 검이라, 그 말씀을 가지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 영혼과 마음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잘못 형성된 사상과 생각과 고정 관념과 선입견들이 ‘불과, 방망이와,
어떤 좌우의 날선 검보다 예리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고,
뽑고, 태워 마음과 생각과 뜻과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골3:10) 곧 하나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가 뿌려지기 전에 날마다
우리 안에서 말씀의 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돌들을 뽑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삼 십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으로, 믿음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귐 속으로 들어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보세요. 이처럼 믿음과 말씀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깊은 관계와 교제의 누림 속에서 사는데 예기치 않은 큰 광풍이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광풍이 내 잘못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외부의 다른 곳으로
부터 나와 상관 없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런 것이 오면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놀랐지만 이제는 놀라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광풍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광풍이 더욱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히려 폭풍을 기다렸다가
그 폭풍위로 올라가 그 폭풍을 타고 3천킬로나 날아 가는 알바트로스처럼 폭풍속에서도 살아계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예수님과의 교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날마다 때마다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