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1, 2014

JUN. 8. 14. LWC 주일강단 : 십자가 부활 그 이후 (히4:14∼16)


십자가 부활 그 이후

-4:1416-


우리의 믿음 생활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이성에 기초를 둡니다. 이러한 분은 합리적으로 납득이 가는 것만을 받아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역사에 대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자신이 체험한 경험에 기초를 둡니다. 체험은 귀한 것이지만 잘못하면 자신의 주관적 체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 체험만을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이성과 경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이성과 경험은 모두 인간 자신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 우리 믿음에 더욱 기초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거짓된 것이라면 이것처럼 심각한 오류의 근원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이미 거짓이면 아무리 이성적으로 납득을 하고, 경험과 체험이 많다 할지라도 그 신앙은 거짓의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는것 밖에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썩어 끊어지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우리의 마음 이전에 더욱 중요한 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냐? 믿지 못할 거짓 존재냐? 이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의 기초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저 사람은 믿을 수 있어!' 라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의 말과 삶이 일치할 때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말은 좋은데 그가 말한 대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사람과의 신뢰도 이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믿음의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 가지로 인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입니다. 둘째는 그 인격과 속성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셋째는 그 인격과 속성에서 나온 말씀대로 사신 삶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살아계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공의와 사랑을 비롯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인격과 속성에서 나오는 말씀은 진리이고 그것이 진정한 진리임이 확증되는 것은 그 말씀대로 사심 곧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짓 신이 아닌 진리의 신이심을 드러내는 증거는 자신의 인격과 속성에서 나온 약속의 말씀대로 성취하심이 일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거짓되면 그것은 거짓 신이요,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그 말씀 그리고 삶이 역사 속에서 일치하셨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성과 경험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화답하여 순종함으로 진정한 신앙의 기초를 뿌리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이 말씀으로 나타나고, 그 말씀이 성취됨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속에 바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약속의 말씀, 그 말씀대로 인간으로 오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심의 역사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누가 진리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진리임을 증거 합니다. 바로 이 성취의 구속 사건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리의 기둥으로 세워져 우리의 믿음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의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성취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의 기둥을 세워주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 진리를 증거하기 원합니다.


1. 십자가와 부활 이후는 승천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여기 보세요. 마지막 구절에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가 바로 '호몰로기아'란 말로 '일치','고백'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믿어야 하는 교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자가 없고...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이것은 승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벌써 이 구절에서 승천과 재림 곧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의 진리의 다섯가지 기둥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승천하신 이'라고 하실 때 그 원뜻은 '여러 하늘을 가로질러 올라가신 이' 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셋째 하늘에 올라갔었다고 하였습니다.(고후12:2) 그곳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하늘의 하늘이라고 했습니다.(148:4) the skies highest heavenly 을 구분해서 말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소위 칠층천까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사탄이 공중의 권세를 잡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이것이 다 영적 전쟁을 치르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곧 여러 하늘을 뚫고 올라가셨다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을 물리치고 올라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들을 삼키고자 하나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12:5b)고 하심으로 승천 자체가 치열한 영적전쟁임을 계시하십니다.
    
바로 이 승천의 진리의 교리를 굳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까지 구속역사를 위해 영적 전쟁을 다 치르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맞이 하십니까?

2:2933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시고 승천케하셔서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심판이 챔피온의 손을 높이 들어 승리를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육신을 통해 이 세상에 파송하시고, 십자가로 구속역사를 이루시고, 부활로 사망권세를 깨고, 승천하여 진정한 임금과 구주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은 예수님의 구원 역사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성도와 교회는 오직 이 다섯 가지 진리의 기둥 곧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의 우리의 믿는 진리를 굳게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넘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승천하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1) 대제사장 사역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대제사장 역할을 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구약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먼저 세움으로 진짜 대제사장직이 나타날 때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신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자요 제사 드리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돼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천상의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자신이 핏 값으로 주고 사신 자기백성 곧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니다. 이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소위 자칭 중보기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어떤 사람 사이에 자신이 중보자가 되어 있다는 말이예요. 이 말을 잘못 사용하면 자신이 예수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 없으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요. 그저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15절을 보세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느니라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연약함을 깊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세요. 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다 겪으셔서 실제로 우리의 형편을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왜 외로운지 아세요. 자신이 혼자고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주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내 아픔과 좌절과 절망을 누가 알아 줄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을 알아주고 그렇게 깊이 치유해 주며 함께 아파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신다고 하세요. 그것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우리의 연약함에 동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이 되셨고, 가장 가난한 말구유로 오셨고, 인간의 모든 고초인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핍박과 번민을 친히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현재의 연약함을 함께 나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을 하나님께 중보하심으로 우리로 승리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제사장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게 있는지 아십니까? 로마서 8:34절 이하를 기억하시죠?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이 중보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능력이요,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 를 위해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나님의 귓전에 올리심으로 그 기도 때문에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누구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대제사장이신지 모릅니다. 누가 우릴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겠습니까? 우리 주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대제사장 사역을 하십니까? 다윗은 이것을 예언했는데 사도행전 2:34,35절을 보세요.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여기서 "주께서 내 주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네 원수로"에서 내가는 하나님이시고, 네 원수는 사탄입니다. 그 사탄을 예수님의 발등상 곧 보좌 앞에 있는 발 받침대가 되게 하기까지 곧 완전히 사탄을 제압하는 그날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서 대제사장 사역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전히 사탄을 제압하고 영원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시는 그 날까지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임금과 구주와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오른손을 높이 드사 임금과 구주로 선포하시고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2:33을 보세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 우리의 집을 예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1

3을 보세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세 번째 사역이 바로 우리가 살 영원한 집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 집이 다 준비되면 다시 데릴러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결코 재림을 잊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살집을 다 준비해 놓고 데릴러 오는 것이 재림인데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성도를 두려움 가운데 처하게 하면 그것이야 말로 사탄에게 미혹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재림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성도는 오히려 재림을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종말을 무서워하는 자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기도하고 계시며,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온통 저와 여러분을 위해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3.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승천하셔서 하시는 사역에 대한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14b) 어떤 환경, 어떤 어려움, 어떤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있는 또 다른 것을 붙 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 하셨습 니다.(14,15)

우리에게 여전히 연약함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 연약함을 능력으로 바꾸실 큰 대제사장이 계시고 그 분이 하시는 이 사역을 굳게 믿고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1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라 진노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그 앞에 감히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물 되시고,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사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두려움 가운데, 주춤하는 가운데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던 그 은혜를 날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을 얻기 위해 언제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가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연약함에 은혜가 부어져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Friday, June 6, 2014

JUN. 1. 14. LWC 주일강단 : 무너진 십자가의 제단을 수축하라 (왕상18:30-40)



무너진 십자가의 제단을 수축하라!
-왕상18:3040-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왕은 아합 이었는데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바알과 아세라 곧 우상의 백성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잘못된 아합의 결혼에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을 했는데 이세벨이 누군지 아십니까?

당시 팔레스틴땅 북 지중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는데 다른 이름으로 페니키아입니다. 이 페니키아는 지중해의 모든 나라들과 무역을 하면서 가장 부요한 나라가 됩니다. 당시 스페인 지역까지 진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역은 물건을 빠른 시간 안에 매매 해야만 더욱 부요해 질 수 있으므로 그 매매한 것을 빠르게 기록으로 남기려 하므로 문자가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알파벳의 기원이 페니키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 무역 을 하므로 늘 바람 신을 섬겼습니다. 바람이 불면 배가 잘 가기도하고, 비가 오고 파도가 높으면 위험해지므로 바람 신을 모시게 됩니다. 그 바람 신이 페니키아 말로 바로 바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어진 다음에 북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여로보암이 친페니키아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일곱번째 왕인 아합시대에 최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두 사람이 가장 밀접한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 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과 문화와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이 이세벨을 맞이하자 페니키아의 경제적 이익이 들어옵니다. 문화가 들어옵니다. 풍요 로와 집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여름별장, 겨울별장을 짓고 심지어 상아궁도 짓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바알을 들여와요. 비의 신이 들어오니 가나 안의 토양과 딱 맞습니다. 가나안 땅은 거의 광야지대인데 비만 제 때에 오면 옥토가 되고 온갖 과실류를 맺습니다. 그러니 바람신 곧 바알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가정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게 되자 가뜩이나 북 이스라엘 백성 들이 신앙이 흔들 리는데 완전히 풍요의 신 바알에게 빠져가고 말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가정 마다 하나님의 제단은 무너지고 바알의 제단이 세워지는 것이예요. 바로 엘리야의 시대가 이런 상황이었습 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가정 제단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풍요 의 신, 물질의 신을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풍요를 위한 수단 으로만 모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잘못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데 실상은 바알을 섬길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아합시대에 하나님께서 3년 넘도록 비를 안 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을 괴롭히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예요. 누가 하나님이신지? 바알이 하나님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이신지를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가정마다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갈멜산의 영적 전쟁을 통해 우리 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머뭇 머뭇 하지 말라 (21)

엘리야의 시대는 고난의 시대였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3년 반 동안 아무 수입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3년 반 동안의 수입을 다 손해 보았다고 하면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시대가 엘리야 시대입니다. 사실 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가서 3년간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게 하셨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아합 왕과 그 부인 이세벨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에 하나님은 그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3년 반이 지나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갈멜산으로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를 주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21절을 보세요.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3년 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달라고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무려 85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 또한 바알에게 수 많은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밤에 이슬하나 내리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의 신인 바알은 비의 신, 풍요의 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바알이 비를 내려서 자신들이 풍요롭게 산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가나안의 신과 문화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바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비를 안 주시는 것입니다. 과연 가나안의 바알이 하나님인지,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 하나님인지 택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모시고 사는 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비가 내리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을 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아합도 엘리야를 죽이려고 날마다 찾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 보았 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수결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백성들이 머뭇 머뭇거립니까? 다수결에서 지기 때문입니다. 여론에서 밀리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850:1에서 850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엘리야는 너희는 많으니(25) 라고 하지만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지만 그는 다수가 없는 생명을 걸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르는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믿음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는 타협하는 자가 아니 었습니다. 주저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기억하시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이 결단이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라 (30)

갈멜산에 모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는 송아지를 제물로 잡고 각각 자기의 신께 기도하므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증명하는 영적대결을 벌립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송아지를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들에게 응답해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없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규례를 따라 자기 몸을 자해하며 피를 내고 미친 듯이 뛰놀며 외칩니다. 그러나 정오가 되어도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엘리야는 모든 백성을 가까이 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30)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엘리야는 불을 내려 달라고 하기 전에 여호와의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이 순서임을 이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진정한 제단과 제물됨 위에만 불로 응답하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단은 무너지고 바알의 단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그리고 머뭇 머뭇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야곱의 열 두 아들 곧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해 제단을 다시 수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 합니다. 이 야곱은 옛적에 여 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31b)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길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 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건만 지금 이스라엘의 기도의 단과 예배의 단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무너졌습니까? 솔로몬 후기부터 북 이스라엘 1대왕 여로보암부터 7대왕 지금의 아합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솔로몬 시대에 부귀영화가 넘치면서 오히려 나라 차원의 제단이 무너지고, 각 가정의 제단도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다시 세워요. 그 옛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던 그 제단, 요단을 건너 길갈에 세웠던 그 제단, 다윗이 예루살렘에 세워 하나님께 예배했던 그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돌로 단을 수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을 세워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12지파를 대신하는 제물을 올려 드림으로 무너진 백성들의 믿음의 단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이 주는 풍요를 우상으로 삼았던 그 제단을 무너뜨리고 다시금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 깊은 마음을 보시고 그의 기도에 기쁨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여호와의 단이 무너져 있는 한 하나님은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 한 역사하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다시 수축하십시오. 다시 여러분의 가정을 성소로 회복하십시오. 식구의 수효 대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의 무너진 단을 다시 수축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LWC공동체의 가정마다 여호와의 단이 세워져 예배가 회복되는 역사가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라 (32)

32절을 보세요.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할 때 한 가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열 두 돌로 제단을 쌓을 때도 여호와만 의지하며 돌을 옮기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종자 약 15리터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때도 오직 주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단 위에 나무를 올리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그 위에 놓을 때도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세 번 부으라고 할 때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드디어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가득차게 되었을 때도 주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엘리야가 드리는 제단이 형식적인 예배, 두 마음을 품은 예배가 아니 라는 것입니다. 그는 둘러선 사람을 의식하지도,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도, 심지어 최고 권력을 가진 아합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진정한 예배자였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의지한 여호와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 뜻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그는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한 것입니다.

잠언 3 5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명철이나 지혜로 이 고난의 시대를 극복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를 인정함으로 이 영적대결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마저도 내어 맡겼습니다.

만약에 불의 응답이 없으면 아합이 죽일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생명마저도 드립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 진정한 예배를 이스 라엘에게 회복시켜 줍니다.

생명을 건 예배회복 이것이 엘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 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오직 생명을 건 예배 회복을 교회와 가정에서 다시 세워나가시길 소원합니다. 내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돌을 옮기고 단을 쌓을 때 하나님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심으로 예배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4. 언약의 하나님을 부르라 (36)

정오부터 시작된 제단 수축 후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는 드디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너무나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의 기도는 수많은 시간을 올렸어도 아무 응답도 없었지만 엘리야의 기도는 참으로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차이입니까? 기도의 양이 문제입니까? 물론 오래 기도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오래 기도하십시오. 오래 기도 할 수 있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바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은 없는 신이요, 그들은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찾기에 아무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소원만 빌 뿐입니다. 바알은 없는 신이요, 죽은 신이요, 만들어진 신이기에 아무 관계도 맺을 수 없으며 능력도 없어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오래 불러야 대답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한 마디면 "그래, 내가 여기 있다" 하시는 것입니다.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아는 것, 그것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빠! 아시지요?” 관계 속에서 기도하면 이미 다 아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엘리야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36)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의 이 한마디가 하나님의 심장을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아는구나!’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아브 라함을 선택하셔서 그에게 이 땅의 자기 백성을 구원 하시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세우 셨습니다. 이삭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야곱 곧 이스 라엘에게도 그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세 족장과 언약하실 때마다 꼭 따라서 주신 말씀이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 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 가운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언제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시길 기뻐 하셨 습니다. 그 호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약의 호칭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비전이 담긴 호칭 입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것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3:5,6;20:37)

그러나 지금 엘리야 시대에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후손인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그 언약을 깨어 버리고 바알을 섬기고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제단을 다 파괴해 버리고 바알을 부르며 비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약의 의미도, 비전도 상실했습니다. 그저 비만 달라고 해요.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자기들의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엘리야가 이 언약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들은 이 언약을 다 잊어 버렸 고, 언약의 주체이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조차 다 잊어 버렸 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바로 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가 성경전체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 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36) 이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언약과 그것을 이루시는 과정 그리고 현재 타락한 이스라엘의 형편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꿰뚫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 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2"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의 여전한 하나님임을 저들이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저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단을 다 무너뜨렸다 할지라도 이제 종이 다시 세우오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이들을 되돌아오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하나님의 종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응답하시고 싶은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도에 하나님은 마침내 무엇으로 응답하세요?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8)

불로 응답하세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평생에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OO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렇게 불러보신 분이 계십니까? 바로 이 기도를 하나님은 지금도 그토록 기다 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아는구나! 언약을 아는 구나! 네가 엘리야처럼 아는구나하시면서 너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이 무엇을 주시나요? 온 세상이 바알을 따라가도 너 한 사람은, 우리 한 가정은, 우리 한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외로운 길입니다. 두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결국 승리의 길이요, 방황하던 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우리 교회, 가정되길 소원합니다.

부모가 세상의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면 자녀들도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부모가 가정 제단을 생명처럼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 자녀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질 것입니다. 나갔다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되돌이키실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생명 걸고 무너진 십자가의 단을 수축합시다.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을 온전히 부르시길 소원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살아계신 주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제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성령의 불로 충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Thursday, May 29, 2014

MAY. 25. 14. LWC 주일강단 : 십자가 공동체 위에 부어진 성령 (행1:4∼5)




십자가 공동체 위에 부어진 성령
-1:45-




성경은 교회가 버림받은 돌이신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기초가 되어 그 위에 터와 기둥과 그리고 벽돌 하나 하나 지붕까지도 모두 십자가 예수님의 DNA로 세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기인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돌과 그를 닮은 작은 돌들을 최고의 보석으로 만드셔서 결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시작과 과정과 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히 따라 다닌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처음부터 열정적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누구도 그의 열정을 이기지 못할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과연 무엇을 하시려는지도 모르고 따라다닌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알게 되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결국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십자가도 부활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했지만 곧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 하시니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님을 붙잡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라 다녔고, 주로 고백했지만 곧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온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변화되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사도행전4:11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몇일 전에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예수 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예수님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 을 말합니까? 베드로가 드디어 하나님이 건축자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는 몰랐어요. 그는 그저 예수님의 기초 위에 자기 명성, 자기 공로, 자기 포지션을 쌓아 올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교회인줄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세우려고 그렇게 서로 싸웠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알게 된 것입니다. 건축자 하나님의 뜻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과 그 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건축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갈보리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을 체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위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을 직접 경험한 사도가 됩니다. 그 이후 그는 완전히 변화됩니다. 그는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교회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어떻게 세워져야 하며, 어떻게 자라가야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제물 위에 세워진 교회와 십자가의 원리로 세워지는 교회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위에 하나를 더 부어주심을 경험하게 되요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거룩한 성령이십니다. 곧 교회를 십자가와 성령의 공동체로 만드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이 세우시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세우시기 원하시는 이 두 가지 곧 온전한 십자가와 거룩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를 성령의 공동체로 만드십니까?


   1. 성령 공동체로 만드시는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까? 제사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려는 것이 대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문제가 있어요.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함께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인간은 죄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피흘림이 없이는 절대 죄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제사를 통해 인간 대신 어린 양이 피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세요.  

그래서 구약의 제사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 함께 사는 과정이예요. 따라서 제사에서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제물을 죽여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제단에 태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제사드리는 자와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게 되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아세요?

레위기 9:2224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역대상 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역대하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니

열왕기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지금 구약성경에 네 번에 걸쳐서 하나님으로 부터 불이 내려온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의 시대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제단과 제물 위에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불이 제단과 제물에 내려왔는데 이것이 순서예요. 어린 양을 잡아 제물을 제단에 드린 후 하나 님께서 그 제사드린 자와 제물을 기쁨으로 받으시면 그 다음에 하늘로 부터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결코 불이 먼저 내려오고 그 다음에 제물을 올린 것이 아니예요. 제물이 먼저고 그 다음에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제물되셔야지만 그 다음에 하늘로 부터 불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체험하기 원하시지요? 성경은 성령을 한번만 체험하고 추억으로 삼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5:18절에 보면 성령충만을 계속해서 받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온전한 제물로 드려질 때 비로소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무데나 오시는 것이 아니예요. 성령은 오직 십자가의 제물 위에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되지 않고 성령을 받으려는 것은 욕심이예요. 잘못된 것입니다. 뭘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그저 신비한 은사나 능력을 소유하고 싶어서 성령을 달라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불을 받아요.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삶에 제물됨이 없는 엉뚱한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어느 교회에서는 그토록 성령을 사모해서 교회가 뜨거운데 예배마치고 나가면 서로 먼저 나가려고 교통질서를 무시하고 신호등도 다 무시하고 갑니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성령받은 것은 현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 아는 것이예요. 성령은 우리가 온전한 제물되어질 때, 곧 내가 철저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죽을 때 역사 하시는 것이예요. 이것이 원리요,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이 바로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되심 후에 성령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단과 제물 위에 불이 내린 것은 모두 이것을 예표하는 것입 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온전한 제물되고 그 위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나아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2.어떻게 십자가 공동체를 성령 공동체로 만드십니까?

1:4,5을 보세요.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먼저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라고 하세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약속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하셨다는 것은 성령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날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고 승천하여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몇 날이 중요합니다. 이 몇 날은 시간적으로는 보다는 영적으로 중요해요. 그들이 무작정 몇 날 동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 예요. 교회 공동체가 매일 모여 온전한 십자가의 제물이 되며 기다리는 것이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본질을 이제 깨달으며 그 안에서 자기들도 죽고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예요. 120명의 성도들이 날마다 모여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 마음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하신 성령을 공동체가 받는 자세입니다. 곧 십자가의 제물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다 흩어진 자들이요,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이제야 비로소 십자가 위에 세운 공동체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동일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여야만 합니다. 기도 가운데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께서 우리 공동체에도 강하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오순절에 어떻게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2:3을 보세요.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불의 혀처럼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각 사람이 다 온전한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만 불이 임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제물된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령이 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제물이 되지 않았는데도 성령을 받았다고 해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처럼 위험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제물이기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120명의 성도들에게만 부어지나요? 아니예요. 2 38, 39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누구든지 회개한 자에게 선물로 주신다고 했어요. 회개는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하여 돌이키는 것이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해요. 곧 십자가의 제물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사함을 받아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만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이 오셨습니까? 오순절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물 되시고 부활 하신 후 지상에 40일간 계셨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 안식일 다음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니 승천하신 후 열흘쯤 되서 임하신 것입니다.(레23:15)  

그러면 성령은 2천년전 오순절에만 오시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2:18,20 보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까고 곧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을 부어 주십니까? 오순절을 다른 이름으로 맥추절, 초실절 이라고 합니다. 보리를 첫 추수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곧 영적 추수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순절의 120명의 성도가 십자가 새 언약의 첫 추수가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동시에 바로 이 십자가 위에 세운 교회 위에 성령의 능력으로 입히셔서 성령 공동체를 통해 추수의 역사를 계속해서 해 나가시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이 오셔서 추수하 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 공동체가 온전한 십자가의 제물로 날마다 나아갈 때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 추수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합 니다.


    3. 성령 공동체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온전히 제물되는 공동체가 더불어 성령의 공동체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떠한 열매입니까

2:11을 보세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숨어 있던 자들이, 말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회개를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15개 지역에서 모든 자들에게, 그들에게 선교가 시작되고 선포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공동체의 열매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정한 공동체로 회복됩니다

4447절을 보세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었어요. 곧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물질로 어려운 자, 힘든 자를 서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나누고 섬길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할 때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한다고 했습니다. 동일한 성령 안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날마다 성전에서 모이고 집에서 모였습니다. 모여서 떡을 떼며 예배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5:42)고 했습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건강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3:6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은과 금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와 성령으로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전에 없던 것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 개인도, 초대교회도 이제 한가지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우리 교회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이름의 능력을 확인하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개를 바친 소년처럼 그렇게 내가 할 수 작은 것들로 주님께 헌신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축사하셔서 오천 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과 열매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성령 공동체의 열매가 행3:12,15절에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너희가…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여기에 나타난 십자가와 성령 공동체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기 전에 베드로는 3년 내내 가장 높은 자가 되길 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12명 가운데 가장 높아지고 싶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변화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치고 나서도 자신의 권능과 경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자기 겸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자의 제물되고 그 위에 성령의 부음을 받은 사람과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진정한 십자가 공동체와 진정한 성령 공동체는 더 이상 자기를 높이지 않습 니다. 자기를 주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직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우리 LWC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오직 건축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일을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진행하고 십자가로 끝내는 교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진행하고 성령으로 마치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참된 십자가와 성령의 교회가 되어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증거하는 교회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