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4
생각하며 삽시다!
-엡2:11~22-
우리는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삶속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 가운데 한 단계 더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장 11절을 보세요.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생각하라 고 합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1장부터 2장10절까지 서론 부분의 결론적 표현입니다. 사실 믿음
생활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믿음이 맹목적이 되어 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의 계시를 주신 것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셔 인격을
갖게 하셨 습니다. 인격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에 생각 하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므네모뉴오”라는 말인데 “마음에 두다”, “상기하다”,
“기억하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에 뿌리 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기억하시지요?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고 하는 줄 아세요? 그의 노년에 쓴 서신 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1:12-15)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미 알고 진리에 서 있으나 그래도 항상 생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순교 직전까지도 너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끝까지 해야 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예요. 심지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나 베드로나 우리 성도들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 바른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에 이것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2:11~12)
12절을 보세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먼저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이 어떠한 상태였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섯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② 무할례자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요 ③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④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⑤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⑥ 하나님도 없는 자 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요. 바로 우리의 옛모습이요.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크게 두가지 소외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앞에 네가지 곧 이방인, 무할례자, 이스라엘 밖의 사람,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뒤에 네가지 세상의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던 상태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미 알고 진리에 서 있으나 그래도 항상 생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순교 직전까지도 너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끝까지 해야 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예요. 심지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나 베드로나 우리 성도들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 바른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에 이것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2:11~12)
12절을 보세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먼저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이 어떠한 상태였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섯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② 무할례자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요 ③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④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⑤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⑥ 하나님도 없는 자 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요. 바로 우리의 옛모습이요.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크게 두가지 소외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앞에 네가지 곧 이방인, 무할례자, 이스라엘 밖의 사람,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뒤에 네가지 세상의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던 상태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자들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언약의 복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의 용어로 말씀드리면 하늘의 상속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속권이 없는데 이 세상에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이었다는 것, 곧 이방인이요, 무할례자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언약의 약속들에 대해 외인이요 따라서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되새김질 하고 기억하고 생각할 때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여 실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2:13~18)
13절을 보세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먼저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이제는 으로 시작합니다. 11,12절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고, 13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 상태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하세요? “멀리 있던 너희”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과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누구하구요? 먼저 하나님과 가까워 진 것입니다. 둘째는 먼저 언약 백성된 자들과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때문에 가까워졌다고 하나요? 바로 그리스도의 피, 예수의 피, 곧 보혈로 가까워졌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는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또한 언약 백성들 가운데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 죽음 만이 진정한 화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래서 13절을 이제는 으로 시작합니다. 11,12절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고, 13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 상태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하세요? “멀리 있던 너희”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과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누구하구요? 먼저 하나님과 가까워 진 것입니다. 둘째는 먼저 언약 백성된 자들과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때문에 가까워졌다고 하나요? 바로 그리스도의 피, 예수의 피, 곧 보혈로 가까워졌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는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또한 언약 백성들 가운데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 죽음 만이 진정한 화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된 것,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된 것이 화해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중간의 막힌 담을 그 누구도 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헐어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그 원수된 조문을 다 폐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데 그것을 새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잘 보세요. 여러분! 그리스도 밖의 옛 사람은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상대방을 용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율법의 조문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며 분리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새사람은 다릅니다. 용서와 용납과 화해의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둘이 하나 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유대 인이 이방인을 받아 들이고, 이방인이 유대인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 만큼 세계관을 깨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것을 해 냅니다. 십자가는 정죄하고 분리하는 원수된 것을 쳐서 소멸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사람이 정죄와 분리를 일삼으려고 할 때 십자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야 용납이 되고, 용서가 되며, 화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십자가의 사람이 되면 나의 원수마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놀랍게도 두 종류의 화해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수직적 화해로 하나님과 화목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다 풀어 자유케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수평적 화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입니다. 곧 사람과 사람의 화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십자가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아니 가능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성도요,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18절을 보세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된 것,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된 것이 화해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중간의 막힌 담을 그 누구도 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헐어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그 원수된 조문을 다 폐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데 그것을 새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잘 보세요. 여러분! 그리스도 밖의 옛 사람은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상대방을 용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율법의 조문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며 분리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새사람은 다릅니다. 용서와 용납과 화해의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둘이 하나 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유대 인이 이방인을 받아 들이고, 이방인이 유대인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 만큼 세계관을 깨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것을 해 냅니다. 십자가는 정죄하고 분리하는 원수된 것을 쳐서 소멸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사람이 정죄와 분리를 일삼으려고 할 때 십자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야 용납이 되고, 용서가 되며, 화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십자가의 사람이 되면 나의 원수마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놀랍게도 두 종류의 화해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수직적 화해로 하나님과 화목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다 풀어 자유케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수평적 화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입니다. 곧 사람과 사람의 화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십자가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아니 가능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성도요,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18절을 보세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고 했어요.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 아니예요. 오직 십자가로 만 가능해요.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성령안에서 둘이 하나인 우리가 되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부자나 가난한자나, 배운자나 못배운자나, 갓난 아이나 백발의 어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영어교회 나 한어교회나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어와 민족과 인종과 빈부과 계층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자신 안에 형성된 세계관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요나가,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상당히 어렵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 두 분의 생각을 열어 주시고 바꾸어 주심으로 이방 선교의 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우리 공동체가 하나됨을 힘써 지키고 누리는 역사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부자나 가난한자나, 배운자나 못배운자나, 갓난 아이나 백발의 어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영어교회 나 한어교회나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어와 민족과 인종과 빈부과 계층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자신 안에 형성된 세계관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요나가,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상당히 어렵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 두 분의 생각을 열어 주시고 바꾸어 주심으로 이방 선교의 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우리 공동체가 하나됨을 힘써 지키고 누리는 역사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생각하라(2:19,20)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입니까? 1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리스도 밖에서는 외인이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외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그 네란 주인과 상반되는 외국인을 말합니다. 이제는 나그네와 같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조국에 사는 우리 민족들보다 외국에 나와 사는 우리가 시민권의 의미를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 시민권이 갖는 의미를 참 잘 알게 됩니다. 시민은 자유와 평등 가운데 모든 의무를 행해야 하고,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시민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어떠하겠습니까?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셨습니다. 권속은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맏아들 곧 맏형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형제가 되어 공동상속자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의 피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이요, 무할례자요, 이스라엘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하나님도 없는 자였던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고, 하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십시오. 이웃과의 화해를 누리십시오. 그래서 수직과 수평의 관계 속에서 화해 와 화목이 넘치는 진정한 십자가의 새사람, 새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자라가는지 생각하라 (2:21,22)
20절을 보세요.
너희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여기서 갑자기 건축용어가 등장합니다. “터, 세움, 모퉁잇돌” 이런 단어들이 주는 메시지는 이제 성도가 새로운 건축자에 의해 지어져 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없이 내가 커지려고 했습니다. 내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 니다. 나도 모르게 사단이 세우는 나라에 일군 노릇을 했습니다. 사탄이 세우려는 건축에 열심히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건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건축용어가 등장합니다. “터, 세움, 모퉁잇돌” 이런 단어들이 주는 메시지는 이제 성도가 새로운 건축자에 의해 지어져 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없이 내가 커지려고 했습니다. 내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 니다. 나도 모르게 사단이 세우는 나라에 일군 노릇을 했습니다. 사탄이 세우려는 건축에 열심히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건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건축의 작은 돌들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 건축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세상으로 부터 버림받은 돌입니다. 곧 세상으로 부터 천대받고 외면 받고 이방 취급받고, 죄인 취급받아 건축자들의 버림 받은 돌입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버림 받은 돌인
예수님을 새로운 건축의 모퉁 잇돌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선지자와 사도의 터가 놓였습니다.
바로 이 모퉁잇돌과 터로부터 세상에서 사탄이 세우려고 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건축 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21,22절을 보세요.
바로 이 모퉁잇돌과 터로부터 세상에서 사탄이 세우려고 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건축 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21,22절을 보세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처소가 되어 간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완성된 모습이 바로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곧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곧 신부 어린 양의 아내라고 하셨습 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궁극적인 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처소가 되어 간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완성된 모습이 바로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곧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곧 신부 어린 양의 아내라고 하셨습 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궁극적인 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큰 영광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고, 사람과 사람을 하나되게 하심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이 십자가의 화목케 하심에 우리의 옛사람과 옛생각과 옛성품을 다 녹여내고 전혀 새로운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사람과 화목케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음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교회를 보는 바른 눈이요, 생각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되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우리 공동체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함께 자라가는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이 놀라운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되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우리 공동체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함께 자라가는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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