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6
기도하며 삽시다 2
-엡3:14∼21-
오늘 아침에 바울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의 기도에 이어 두번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그의 감옥 생활이 교회를 위한 기도의 생활이요, 말씀을 써서 보내는 선교의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14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러므로”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복음이 이방인에서 전파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을 말하면서 에베소 교회 여러분이 바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합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선교적 기도입니다. 지금 이방선교를
하는 바울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 곧 천지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주인이시요,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비는데 물론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모든 족속을 품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기도는 좀 차원이 다릅니다. 그의 기도를 보세요. 놀랍게도 자신을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을 꺼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요. 오직 우리를 위한 기도요,
교회를 위한 기도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기도도 바울의 기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마음을 울리는 기도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사람들로 온전히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 두번째 기도에서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
16절을 보세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의 첫번째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의 겉사람을 위해 기도해요? 우리는 너무나 외적인 것, 드러나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을 간구합니다. 바울이 과연 그것을 몰랐을까요? 아녜요.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속사람의 강건부터 기도합니다.
그러면 왜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합니까? 속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겉사람을 지탱해 주는 내면의 나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거예요.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겉사람 또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속사람이 강건하면 세상의 그 무엇도 다 이겨나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속사람이 유약하면, 확신이 없으면, 속사람이 병들어 있으면 아무리 외부의 좋은 것을 갖다 주어도 싫은 것입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건하면 넉넉히 승리하고도 남습니다. 깊은 바다 속 물고기들이 어떻게 그 엄청난 수압을 이겨내는지 아세요. 물고기 내의 수압이 그 바닷 속 수압과 같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심해 물고기는 부레 곧 공기를 담아두는 주머니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요. 만약 부레에 공기를 갖고 있으면 조금만 압력이 높은데로 올라오면 다 터진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에 맞는 체액으로 차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안의 수압이 밖의 수압을 상쇄하면서 자유롭게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이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 라고 기도할 때 몇가 지 중요한 원리를 같이 기도하고 있어요. 막연하게 속사람이 건강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속사람은 다른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둘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셋째는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곧 성도의 속사람이 무엇으로 강해지는 것입니까? 세상의 신념이 아니예요. 인생의 경험 에서 오는 굳은 의지가 아니예요. 그런 것 하고는 달라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그 속사람 안에 가득차는 것이예요. 예전에는 세상의 허황된 영광을 담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갖고 사는 것이예요.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몰라요. 지난 화요일 제자훈련에서 자신을 언약백성 삼아 주심을 묵상해 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 마치고 집사님 한 분이 그것을 묵상하며 운전하고 가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묵상하는데 어느새 자신의 눈에서 언약백성 삼아 주신 것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밖에 내리는 비보다 더 많이 내리더래요.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 채워 사는 사람을 세상의 그 무엇이 이기겠습니까?
그 영광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곧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찬 속 사람을 말합니다. 오순절에 위로 부터 내리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전에는 유대인들의 한마디에 벌벌 떨었던 자들이예요.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가득차니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랴 사람을 두려워하랴고 담대히 말합니다. 채찍과 고문도 그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세상적이고 허황된 부레의 공기를 다 빼 버리고, 거기에 다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가득채우고,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세상의 어떠한 압력과 사탄의 공격에도 넉넉히 승리하는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게 하소서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바울의 두번째 기도내용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것인데 우리 번역이 좀 명확치가 않아요. 여기서 “계시게”라는 표현은 “카토이케오”라는 말인데 “살다, 거주하다”그런 의미예요.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예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 속에 함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해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어요.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크게 경험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자기 의로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늘 허무하고 답답
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어요. 평안이 없어요.
그러나 그가 나중에 어떻게 고백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사는 삶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옥에 갇혀 있어도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에 담대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성도의 속사람 안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고, 그 다음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자, 바울은 먼저 믿음으로 주님이 우리 안에 살게 되는데 그 다음으로 무엇을 간구해요?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사랑에 아기의 마음이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지듯이 오직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뿌리로 부터 무엇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지요. 그 사랑의 터가 굳어져 어떻게 까지 자라가길 기도합니까?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 적인 사랑이 아닌, 머리로만 아는 사랑이 아닌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더 어떻게 알게 해 달라고 해요?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참으로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입체적인 사랑이 어떠할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가 어느 정도 일까요? 얼마나 광대하실까요? 시편 기자는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주님이 거기 계시다고 했습니다. 지평선, 수평선 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너비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지금 바울은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비는 우주를 넘어 끝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가 어떠함을 알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 분 길이는 시간으로 따질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저 잠시 있다 없어지는 사랑이 아니지요. 창조부터 재림까지요, 아니 그 너머 영원부터 영원까지요, 끝없는 사랑이지요. 무엇으로 그 사랑의 길이를 잴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그 불변하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높이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가 어느 정도일까요? 하늘만큼 일까요? 우주만큼 일까요? 성경은 삼층천을 말해요. 가장 높은 곳에 천상에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 자리 자기 우편에 앉히신다고 하세요. 그 높은 사랑을 감당할 수 있나요? 하늘의 상속자로 앉히실 그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에요. 바울은 이 높이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삼층천까지 갖다 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 땅의 성도들도 그 높이를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깊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 깊은 마음이시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아시나요? 과연 그 마음의 깊이를 우리가 얼마나 알까요? 깊이는 배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진정으로 우리가 깨닫고 알게 된다면 우리는 눈물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왜요? 지옥갈 영혼을 건져 천국의 상속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깊이와 자기 아들을 우리 위해 버리셔야만 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요. 과연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처럼 이 땅의 에베소 성도들, 우리가 하나님의 입체적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여기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여러분! 너비, 높이, 길이, 깊이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지요, 끝없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지요. 그 사방에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우리에게 충만케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합시다. 이런 기도드립시다. 이런 기도의 응답을 다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사랑을 받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그런데 바울의 이 엄청난 기도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기도가 더 이어져요. 20절을 보세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지금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이예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것에 더욱 넘치도록 부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이예요.
어떻게 보면 약간 이상한 사람 같지요?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하는 것 같지요. 아니예요. 이것이 성도의 삶과 비전을 정확히 가르쳐 주는 기도 예요. 우리의 두 발은 요동하는 세상을 딛고 있지만 우리의 기도의 두 눈과 손은 하늘을 향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로 부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부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옥과 가난이 바울을 낙심케 못하고, 부요가 바울을 교만케 못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스런 교회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직 주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받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작년 초에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의 교회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 후에 샬롯에 있는 숙소 까지 전도사님께서 라이드를 해 주셨습니다. 처음 뵙는 전도사님이었지만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삶을 나누었는데 참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전도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일하다가 소명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삼십 삼세 된 분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한국에 나가 동갑의 자매와 선을 보았는데 여섯번 만나고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꽃피는 봄이 되면 결혼예배를 드릴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제하는 자매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 다. 이 자매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답 니다. 졸지에 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된 것입니다. 자매는 동생들을 키우며 여상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 다행히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백오십여명이 넘는 직원들 가운데서도 실적 1위에 오를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들 학교 뒷바라지를 다 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유수한 명문 사립대에서 교직원 선출을 할 때 접수를 하였습니다. 자격조건에 부족했지만 지원을 했습니다. 담당 교수께서 자매의 삶의 성실함을 보고 한 번 인터뷰의 기회를 주자고 제안하여 모든 교수들이 면접을 했는데 그녀를 뽑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전도사님은 참으로 열심히 살아 온 자매의 삶에 감동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반려자가 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의 마음에는 늘 눌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부모님이 되실 분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부모없이 자란 사람’이란 자격지심이 있었습니다. ‘내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 까? 어떻게 반응하실까?’ 이것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의 가정은 부산이었고, 자매는 서울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자매에게 걸려 왔습니다. 시어머니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에 자매는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그 한마 디는 “지연아! 엄마다!” 라는 외마디였습니다. 그토록 들어보고 싶었으나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배려와 위로의 이 한 마디가 자매의 수십 년 간의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과 상처를 모두 씻어 주었습니다. 얼마 후 부산에서 올라 온 시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봉투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엄마가 지연이에게 주는 첫번째 용돈” 자매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어느 덧 캄캄해진 노스캐롤라이나 파크웨이를 달리며 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이야기는 제 마음마저 녹여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룻과 나오미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의 한 마디가 상처난 다음 세대를 치유하고도 남습니다. “지연아! 엄마다!”이 어머니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얼마나 놀라운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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