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과 EM이 함께하는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7
합당하게 삽시다!
엡4:1∼16
예전에 30여년전에 미국에 온 한 성도님을 심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어린 소녀시절 가족과
더불어 조국의 한 지방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늘 그의 마음에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 사경회를 열었 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교회를 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설교 가운데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 가 보니 여자 분들도 일을 하더라, 그리 고 빨래를 기계로 하는데 너무 깨끗하고 그
자리에서 다 말리더라. 가장 높은 빌딩이 있는데 그것이 뉴욕에 있더라”소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그래 미국으로 가리라! 미국가서 살리라!”그 날부터 이 소녀는 미국 갈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미국에 와서 산지 벌써30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에는 못같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꿈입니다. 비전입니다. 꿈은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도 다 이 소녀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 곳에 오셨지요? 꿈은 이처럼
도전을 가져오고, 도전은 모험을 가져오며, 모험은 성취를 가져옵니다.
귀하고 복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울 입니다.
바울은 오늘도 자신이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
니다.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드림을 꿈꾸며 로마로
몰려 들었 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갖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로마는 시민권에 관대 함으로 이방을 다 자기편으로 삼았습니다. 로마의 꿈을 갖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실패한 사람이요, 별볼일 없는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놀랍게도 이미 태어날 때 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바울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신앙을 변증하는 수단 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곧 팍스 로마나가 선교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이 곳에서 아메리칸 드림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 가야만 합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져 더 넓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킹덤 드림입니다.
아메리칸 드림도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데 킹덤 드림은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바로 이 말씀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부르심은 삶을 변화시킨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르심이란 단어를 1,4절에서 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부르심은 “칼레오”라는 말인데 “부르다, 초청하다, 소집하다”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5단계 -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 중에서 세번째 단계입니다.
사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만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 부르심은 부르시기 전의 어느 상태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러면 어디로부터 부르셨다는 것이예요?
죄로 부터입니다. 죄의 상태, 죄의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그 가운데서 절망가운데 살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우리를 불러 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은 또한 미래의 변화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곧 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바울의 말처럼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화의 상태로 완전히 변화시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는 죄의 상태로 부터 변화될 수 없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가져와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삼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만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만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1절에서 무엇이라고 권합니까?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지금 무엇이라고 하시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올 사람은 미국 올 준비하며 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부르 심을 입은 자 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악시오스”라는 말인데 그 어원이 “무게를 달다”란 뜻에서 왔어요. 곧 “무게에 맞게”, “가치 있게”, “어울리게”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상당한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 그 부르심이 어떠한 상상도 못할 가치인지 말씀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러므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 곧 하나님 옆에 상속자로 앉히실 부르심의 가치에 합당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모든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은 부르심 이전의 삶은 모든 교만, 무절제, 참지 못함, 미움으로 서로 다툼, 분열과 분리 가운데 평안이 없는 삶이 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이제 그에 합당한 가치로 살아야 하는데 모든 겸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모든 겸비함을 말합니다. 온유는 부드럽게 절제하고 자제하는 능력입니다. 오래참음은 사랑가운데 서로 받아 주는데 필수요소입니다. 이 하늘의 가치는 하늘의 줄로 하나로 매여진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평안의 줄입니다. 그 평안의 줄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평안의 줄이 1장에서 우리 곧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가치를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성숙한 화해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이러한 화해의 가치들이 어디서 발견 됩니까?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이제 그 가운데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도 한 소망과 성품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지 7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보세요. 몸 된 지상교회의 하나됨으로 시작하여 하나님 안에서 우주적인 하나됨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대한 부르심에 합당한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 성도의 품성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왕자된 상속자된 지위에 합당한 성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명품 성도입니다. 부르심은 상당한데 여전히 옛사람이 입고 있던 더러운 옷과 가치들을 붙잡고 있으니 변화되지 않고 우리도 모르게 전도의 문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르심의 가치대로 우리의 속사람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지금 무엇이라고 하시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올 사람은 미국 올 준비하며 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부르 심을 입은 자 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악시오스”라는 말인데 그 어원이 “무게를 달다”란 뜻에서 왔어요. 곧 “무게에 맞게”, “가치 있게”, “어울리게”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상당한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 그 부르심이 어떠한 상상도 못할 가치인지 말씀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러므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 곧 하나님 옆에 상속자로 앉히실 부르심의 가치에 합당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모든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은 부르심 이전의 삶은 모든 교만, 무절제, 참지 못함, 미움으로 서로 다툼, 분열과 분리 가운데 평안이 없는 삶이 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이제 그에 합당한 가치로 살아야 하는데 모든 겸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모든 겸비함을 말합니다. 온유는 부드럽게 절제하고 자제하는 능력입니다. 오래참음은 사랑가운데 서로 받아 주는데 필수요소입니다. 이 하늘의 가치는 하늘의 줄로 하나로 매여진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평안의 줄입니다. 그 평안의 줄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평안의 줄이 1장에서 우리 곧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가치를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성숙한 화해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이러한 화해의 가치들이 어디서 발견 됩니까?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이제 그 가운데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도 한 소망과 성품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지 7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보세요. 몸 된 지상교회의 하나됨으로 시작하여 하나님 안에서 우주적인 하나됨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대한 부르심에 합당한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 성도의 품성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왕자된 상속자된 지위에 합당한 성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명품 성도입니다. 부르심은 상당한데 여전히 옛사람이 입고 있던 더러운 옷과 가치들을 붙잡고 있으니 변화되지 않고 우리도 모르게 전도의 문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르심의 가치대로 우리의 속사람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15절,16절을 보세요.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 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 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곧 교회를 한 몸으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세요. 어린 아이 들이 태어나서 몸이 자라듯이 몸 된 우리 공동체도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교회는 세상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인데 그 부르심의 목적이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하십니까? 13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다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목적인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새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장 보다는 성숙의 의미가 강해요. 성장은 외형적, 양적 자람이라면 성숙은 내면적, 질적 자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은 외적, 양적 성장이전에 반드시 내적, 질적성숙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하늘의 성전의 일부로 자라가는 것을 지상교회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엡2:19-22참조)
그러므로 부르심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 닮기입니다. 속사람부터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성숙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이 완전히 성숙되어진 단계가 바로 구원의 다섯단계 가운데 마지막인 영화롭게 하시는 단계입니다. 이 영화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난 완전한 의의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죄 자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온전히 예수님을 닮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담과 재림 사이에 구원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가 그렇게 변화되어 전혀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시려고 부르신 것이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는 것입니다. 왕자이니 왕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지처럼 죄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답게 모든 겸손과 온유로 왕자답게, 공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성전의 일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목적인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새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장 보다는 성숙의 의미가 강해요. 성장은 외형적, 양적 자람이라면 성숙은 내면적, 질적 자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은 외적, 양적 성장이전에 반드시 내적, 질적성숙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하늘의 성전의 일부로 자라가는 것을 지상교회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엡2:19-22참조)
그러므로 부르심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 닮기입니다. 속사람부터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성숙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이 완전히 성숙되어진 단계가 바로 구원의 다섯단계 가운데 마지막인 영화롭게 하시는 단계입니다. 이 영화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난 완전한 의의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죄 자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온전히 예수님을 닮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담과 재림 사이에 구원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가 그렇게 변화되어 전혀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시려고 부르신 것이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는 것입니다. 왕자이니 왕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지처럼 죄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답게 모든 겸손과 온유로 왕자답게, 공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성전의 일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선물을 받게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심의 목적대로 우리
곧 교회를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성전과 일치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십니까? 놀랍게도 교회에 선물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7절을 보세요.
7절을 보세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누가 선물을 주신다고 하세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로 잡았던 자를 오히려
사로잡으시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사 하나님께 선물을 받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
만물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충만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곧 이러한 영적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세우셨는데 이들이 바로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세상으로 부터 버림받은 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세우시고, 그 위에 사도와 선지자들을 터로 세우시고,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셔서 어떻 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복음 전하는 자(순회 전도자), 목사와 교사 (교회에 정착하여 목양하고 가르치는 자) 또한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늘의 가치로 사는 십자가의 영적 참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교회에 주셔서 세 가지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세가지가 순서를 이룹니다. 12절을 보세요.
이는 ①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②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③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이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를 통해 세워진다는 것이예요. 어떤 성도요 온전해진 성도를 통해서 세워지는데 그의 섬김을 통해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 두가지인데 먼저는 성도가 온전케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온전케 된 성도가 그 몸을 섬김으로 그 몸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온전케 라는 말은 “카탈티 스모스”인데 “준비, 훈련, 완전, 자격이 완전함” 이런 의미입니다. 곧 여기에 목사와 교사의 사명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무엇입니까? 성도를 말씀으로 훈련하여 온전하게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처럼 온전케 된 후에 비로소 봉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케 된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온전함이
나옵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일이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자기가 만든 다른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되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인격적으로 그 분을 온전히 관계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이 “에피그노시스”인데 정확한 지식,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전 히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될 때 온전한 사람이 되어 다른 말로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결국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곧 그의 마음과 속성과 성품을 충만히 닮은 제자로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온전해 진다는 것은 예수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요. 그러한 온전한 제자가 되어 봉사하며 섬길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봉사는 “디아코니아”로 “섬김, 돌봄, 사역, 사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주일에 나와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안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영광 스런 성도가 되려면 말씀으로 훈련되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제자로 온전케 되어 섬김의 사역을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만큼 헌신이 절실한 것입니다.
또 이처럼 성도가 온전히 무장되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세요? 교회를 세우는 것과 더불어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여 함이라
목사와 교사가 성도를 온전케 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분별을 못합니다. 사탄의 사람들의 거짓과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훈련받고 무장하여 부르 심의 제자답게 날마다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바울을 보세요. 오늘도 그는 주 안에서 갇힌 자 라고 합니다. 바울이 어느 정도로 헌신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바울의 헌신과 같은 헌신을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십니까? 아니예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갈 각오로 예수님 믿어야 하고 예수님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사탄과 사람의 속임과 유혹과 풍조에 분별없이 밀려 살수 없기에 온전히 훈련받고 분별하며 섬겨 그리스 도의 몸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그 때까지 감당할 수 없는 부르심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요, 성도로 거룩한 자존심을 지키는 그래서 하나님 왕국의 왕자다운 성품과 품위를
유지하는 성숙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