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단3:1∼12-
신앙생활은 영적인 치열한 싸움의 현장입니다. 사탄의 관심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사탄의 관심은 성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심 또한 성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심령과 삶이 영적 전투의 최전선입니다.
바울은 내 안에 죄성과 성령이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는 사자에게 삼키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과 미국교회에서 유수한 목회자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회가 매너리즘에 빠질 때, 어느새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기념비를 세우기에 여념이 없을 때 영적 빨간불이 들어 옵니다.
목회자도 이런데 성도는 어떻겠습니까? 내 영적 신호등의 색깔은 무엇입니까? 파란불입니까? 은혜의 강물이 계속 흐르게 하십시오! 노란불입니까? 그러면 서야 합니다. 서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빨간불이 들어 왔다면 만사 제쳐 놓고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파란불이 들어 올 때까지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늘 영적 신호등의 색을 살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날마다 깨어서 치열한 영적 싸움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날마다 파란불의 신앙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순교적 삶을 살므로 가능합니다.
순교적 삶은 어느 비상한 시대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평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순교적 삶 만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러한 평상시 순교적 삶을 살 때에만 진정 피 흘리는 순간이 올 때도 기꺼이 죽음보다 강한 신앙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브갓네살은 바벨론 두라 평지에 약 높이 90feet(27m)와 넓이 9feet(2.7m) 의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이 사건은 다니엘서에서 세번째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메시지를 통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위기의 때에 빛을 발하라!
2장에서 다니엘이 왕이 꾼 꿈과 해석을 한 후에 느브갓네살은 다니엘을 왕궁에서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천거로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각 지방의 도지사들이 되었습니다. 120도 중에서 한 도씩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도지사로 있을 때 또 위기가 찾아 온 것입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위기를 믿음으로 승리했는데 또 다른 위기가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1-3장까지 세 번의 위기와 세 번의 승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를 거부한 사건이고, 두번째는 느브갓네살의 큰 우상꿈과 해석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오늘 사건은 자신의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을 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민족을 보세요. 일제시대가 지나니 6 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났더니 독재 권력이 짓밟았습니다. 이제 좀 살만해 졌다고 하니 부정과 부패가 나라를 세월호처럼 침몰시키려 합니다. 위기의 연속입니다. 우리 조국 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과 믿음의 정신으로 세워진 이 나라가 만연된 세속화와 타락으로 교회마저도 자유주의 사상에 배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위기는 계속 찾아 옵니다. 우리 삶 속에는 평안만 있기를 바라지만 위기도 찾아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평안하다 하여 위기의식을 잊고 나태해지면 진짜 위기가 왔을 때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훈련으로 무장되지 않은 군인은 진짜 전쟁이 일어나면 다 도망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시에 사람을 보고 짖지 않는 개가 어떻게 도둑이 왔다고 짖겠습니까? 그러므로 순교적 신앙은 평상시의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서는 왜 이처럼 반복적으로 위기 사건을 다룹니까?
그것은 먼저 성도도 얼마든지 위기를 당할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고, 다음은 위기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앞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장된 축복이 됨을 보이시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위기를 통해 아니 위기를 믿음으로 직면하는 소수의 자기 백성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 그 뜻을 그 시대에 계시 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바벨론의 왕보다 크심을 계시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실 예수의 나라가 올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나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그 뜻을 나타낼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관념적, 추상적 신으로 욕되게 하는가? 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 길에 아무 일도 없고 그저 평안하시기 만을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모두 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위기의 때에 오히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 드러나시게 해야만 합니다! 위기를 무서워하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발할 기회로 삼는 삶이 되십시오! 나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 역사하시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영광스런 삶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아 위기의 때에 찬란히 빛을 발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NO 할 줄 아는 성도가 되라!
이 세 번의 위기와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NO 할 줄 아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는 얼마든지 용납하고 양보하고 종노릇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보드라인(경계선)에서는 반드시 NO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경계선에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기독교 진리를 허물고 들어 오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비진리와 타협하여 인본주의로 전락한 자들이 무수합니다. 예수의 보혈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진리가 신학교와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비진리의 주장들에 대해 분명히 NO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그 왕의 권력과 우상 앞에 다수가 무릎을 꿇습니다.
총독, 수령, 행정관, 모사, 재무관, 재판관, 법률사, 각 지방 모든 관원(2,3) 그리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7)이 나팔과 온갖 악기가 울려 퍼질 때 모두 다 절하고 있습니다. 내 옆에서 모두 엎드리고 있는데 나만 꼿꼿이 서 있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이 엎드린 가운데 오직 세 사람 만이 아무 요동함 없이 서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평상시에는 세 사람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문제만 건드리면 세 사람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드러나고 싶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물고기와 같아서 썩어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와 다른 것입니다. 물결이 흘러 내려갈 때 그들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살아 있기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조용합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나 평상시에 그들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세상이 거꾸로 갑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은 여전히 자기의 믿음으로, 당연한 신앙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이 그 시대에 사람들 가운데 특별해 지는 것입니다. 도드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수가 비진리로 흘러갈 때, 심지어 교회가 배교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 평상시 대로 믿는데 그것이 NO가 되어질 수 밖에 없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고 서 있을 때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요? 권력의 칼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을 가장 자랑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렇고 손양원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이 분들이 서슬퍼런 시대에 NO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제대로 된 신앙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성도의 길인 것입니다.
평상시에, 평안할 때 사탄 마귀의 공격에 대해 NO하고 외치는 성도가 되십시오. 비진리와 거짓 진리에 대해 NO라고 선포하십시오. 세상과 우상이 주는 유혹에 거절할 것을 마땅히 거절하는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
아마 두라 평지에서 우상 앞에 절한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이 순간 만을 넘기자며 절한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리라 결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신사 참배에 참여 한 것을 아무도 몰랐는데 템플턴 상을 받을 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얼마든지 각 지방의 도지사로 있으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을 위해 귀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합리화하여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바로 이 시간, 현재의 상태 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이랬는데’하고 추억 거리가 되어선 안됩니다. ‘미래에는 이렇게 할 것이야’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과 여러분 한 분 한 분과의 삶이요 관계입니다. 신앙은 과거도 중요하고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과거를 말해주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 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절을 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도지사라는 과거와 미래의 자리보다도 우상 숭배를 할 수 없다는 현재의 성도의 자리가 더욱 중하고 귀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자리와 성도의 자리 곧 세상의 유익과 성도의 양심이 날카로운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만날 때 성도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그 자리를 지키는 자 그를 보고 예수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으며, 이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연약한 자가 세상의 유익과 자리에 연연하여 성도의 자리를 버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붉은 수프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먹은 에서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인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를 핏값으로 주고 사신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의 자리가 무슨 자리인 줄 아십니까? 과연 그것이 세상의 도지사 자리만 못한 자리입니까?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자리는 하나님 곁에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는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엡2:6) 과연 어떤 세상의 자리로 하나님 곁에 앉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세상의 유익 때문에 성도의 귀한 자리를 버리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런 성도의 자리를 위해 세상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 니다.
4. 목숨 걸고 믿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신상 앞에서 절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곧 생명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 정도가 아니라 풀무불에 던져 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들을 아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합 니까?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6b)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미 목숨을 내 놓은 것입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생명에 연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상시에 당연한 것이 그 순간에는 생명을 건 순교적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평상시나 위기때나 동일한 신앙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왜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여 세상에 드러내십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은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적 신앙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생명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생명을 던져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귀한 생명을 던지시고 저와 여러분을 살리셨으니 우리도 생명 걸고 예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인 한 감독이 19년만에 ‘시선’ 이란 영화를 개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 고스란히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뀐 자신의 시선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시선’ 이라 지었습니다. 그 영화는 한 교회의 단기 선교팀이 모슬렘 지역에 선교를 갖다가 반군들에 의해 납치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알라를 믿으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생사의 갈림 길에서 겪는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9명의 선교팀이 죽음 앞에서 겪는 갈등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인 공은 가짜 선교사였는데 진짜가 되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자신은 순교하는 감동으로 영화는 마칩니다. 감독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다시 해석하여 세상에 내 놓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는 자기의 영화는 기존과 다른 시선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왜 우리는 이 자리,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까지 나의 소원을 빌고, 나의 작은 유익을 위해서 성도의 자리를 버리는 신앙이었다면 이 시간 부터는 세상의 자리와 성도의 자리에서 당연히 성도의 자리를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성도의 당연한 자리가 순교적 자리로 변화 될 때 우리는 어떤 사탄의 역사도, 어떤 위기도 물리치는 이 시대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저와 여러분,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