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건강한 가정들마다 좋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거실을 라이브러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아이들의 방에서 거실로 내어 놓고, 거실을 서재로
만드는 것은 가정 교육에 매우 좋은 아이디어 입니다. 오고 가며 보이는 것이 책입니다. 어느 새 아이들
손에 책이 들려 있을 것입니다. 책을 읽고 자란 아이는 복이 있습니다. 책 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며 하나님 살아계심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는데 가끔 서재에 있는 책들 가운데 유독 제목이 눈에 띄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서도
힘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부르신 자는 인도하신다”는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신앙생활과 주의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울 때가 언제입니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모를 때가 가장 힘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싶은데 그 뜻을 알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어둠’, ‘영적 혼돈’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에게 계시가 없는 밤처럼 두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요? 이처럼 어두움, 밤은 우리에게도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놀랍게도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게도 그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다섯 번의 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더욱이 그의 다섯 번의 밤은 사역을 한 참 꽃 피울 때 찾아 왔습니다.
첫번째는 드로아의 밤 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 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16:9)
두번째는 빌립보의 밤 입니다.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5)
세번째는 고린도의 밤 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행18:9)
네번째는 예루살렘의 밤 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3:11)
다섯번째가 폭풍 속에서의 밤 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27:23)
오늘 본문이 첫번째 밤과 관련 있습니다. 그의 첫번째
밤 곧 드로아의 밤은 어떠했습니까? 그야 말로 혼돈의 밤이었습니다. 그는 아시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스도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바울이
“애썼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더욱 강력히 막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던 혼돈의 밤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이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여전히 혼돈의
밤속에 머물러 있을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니아 인의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혼돈의 밤을 비전의 밤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두려움과 혼돈의
밤에 비전과 소망의 빛이 환하게 비춘 것입니다. 드로아의 밤은 사명의 방향을 결정해 주신 밤이었습니다.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가라하신 하나님의 주권의 밤이요, 인류 역사의 대 전환점이었습니다.
나머지 네 번의 바울이 경험한 밤들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의 밤은
언제나 어두움과 혼돈, 위협과 두려움의 밤이었습 니다. 맞이하는 밤마다
그는 두려움과 혼돈 가운데 있었지만 해결책은 언제나 주님이셨습 니다. 주님께서 그의
곁에 나타나심으로 어두움은 빛으로, 혼돈은 명쾌함으로, 위협은 안전함으로,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다가 어떤 밤을 만나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만 기다리세요. 반드시 빛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바울이 맞이 했던 첫 번째 드로아의 밤과 그 밤을
통과한 직후의 사건입니다. 혼돈의 밤을 비전의 밤으로
바꾸어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내 뜻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라. (11-12)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리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여기보면 드디어 바울 일행이 자신들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비전을 받은
드로아에서 사모드리게로 직행하고,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리보에
이르니..여기서 “직행하여, 이튿날, 거기서..이르니” 이러한 말들이 바울 일행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마게도냐의
비전에 헌신했고, 지체 하지 않고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 성 곧 유럽의 첫 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내 뜻대로 결정하고, 내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께 따라오시라고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만약에 신앙이
그렇게 패턴화 되면 순종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드디어 그 곳을 떠날 때 성경은 그들이 ‘자기의 길을 가더니’ 라고 하였습니다.(민10:12) 진정한 성도의 자기의 길은
내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구름을 띄우실 때 텐트를 걷고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의 길이요, 순종의 길입니다. 이러한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 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로 기도로 계속해서 인도하심을 받으라.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바울 일행이 빌립보 성에서 며칠을 지난 후에 찾은 것은 기도할 곳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은
비전을 받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기도함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전을 따라
가는 삶 가운데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기도 없이는 다시 혼돈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한
단계 순종한 후에 아니 순종하는 내내 계속적인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23:2에 불레셋이 그일라를 쳤을때에 “여호와께 묻자와” , 4절에도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 온 대” 라고 했습니다. 삼하2장에서도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라고 했습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출애굽한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백성은 항상 원망하였지만 모세는 그 때마다 엎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영광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다윗이나 모세가 위기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생애가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평상시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위기 때는 더욱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늘 기도의 자리로 나아 가시기 바랍니다.
세째로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읽으라.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바울 일행이 기도처를 찾을
때 강가에 모인 여인들에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임에 몇명의 자매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가 바로 루디아입니다. 누가는 그녀가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고 소개합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곧 헬라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를 말합니다. 당시 자색 옷감은
금과 동일한 가격일 정도로 고가의 귀한 상품 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색으로 염료 할
수 있는 것이 ‘에게 해(海)’ 깊은 바다에서
나오는 특별한 조개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겨우 잠수해서 따오는 그 조개는 특별해서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희소가치
때문에 로마의 귀족들 밖에는 입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여인이 바울의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여서셔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비전을 보고, 순종하고, 기도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특히 저와 같은 목사들에게 그런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증거될 때 사람들 가운데 루디아 한 사람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 수 많은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창세기12,18,22장에서 세 번씩이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 말에 한
사람만 마음이 열린 것에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귀히 여기고, 교회의 뿌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한 사람이
되고, 그런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1불로 볼펜을 사면 그 볼펜은 1불 짜리 입니다. 3만불로 자동차를 사면 그 자동차는 3만불짜리입니다. 옆에 있는 분은 얼마 짜리인가? 시편49편을 보세요.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한 영혼의 값이 너무 비싸서 우주의 어떤 물질로도 살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토록 구한다
해도 마련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합니까? 스펙으로 대하고, 연봉으로 대하고, 소유로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원리입 니다. 창조의 원리는 한 사람이 너무 비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명을 죄 가운데서 속량하는 값는 오직 하나님의 생명
곧 예수의 생명 값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값이 아니면 절대로 한 영혼도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옆에
있는 분이 얼마짜리입니까?‘예수짜리’입니다! 주위의 한 사람에게 “귀하십니다!”, “당신은 예수짜리입니다!” 라고 인사하십시오. 진정으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얼마나 귀한 분인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작지만
크게 열매 맺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보세요. 바울 일행이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대로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루디아 한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방금
읽은 구절에서는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바울을 통해 루디아와 그 모든 가족들에게 온전한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증거하였고, 그들은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 전 절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라고 했는데 이제는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이라고 확증하여 말합니다. 곧 유대교적
신앙에서 복음의 신앙으로 완전히 돌아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한
여인의 마음을 여심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정이 돌아왔습니다. 그 뿐이 아니다. 루디아는 곧
바로 자기의 가정을 오픈합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그 집에 들어와 머물라고 합니다. 40절을 보면,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 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곧 한 사람이 돌아온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이 돌아왔습니다. 더 나아가 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더 크게는 유럽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크게 열매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하시면서 겨자씨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눅13:18-19에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루디아가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자 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 때로는 보잘 것 없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작은
일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을
따라가는 삶은 사람의 수보다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피값으로 생명을 주시고 세우신 교회를 설립하는 첫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종은 정말 개척 생각은 없었습니다. 했다면 10년 전에는 해야 했습니다. 이 나이에 개척하는 것은 늦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라 하십니다. 주님이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어찌합니까? 순종 밖에는 없습니다. 늦게 시작하니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준비하고 계심을 보게 하십니다. 두번째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타락할 시간마저도 없는 마음을 주십니다. 본성은 타락할 수 있지만 마음은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정말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세워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공동체를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너무 감사하고, 너무 흥분됩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선한 역사가 아름답게 열매 맺도록 온전히 죽는 한 알의
밀이 되고 싶습니다. 참으로 성도를 위로하고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를 세워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건물이 아닌 사람, 공동체에 집중하길 소원합니다! 매사에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기도하며 순종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의 열매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이 시대에 바울과 같은, 루디아와 같은 비전과 동역의 사람이 되어 LWC 말씀으로 사는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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