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모임을 소위 멘사라고 합니다. 멘사(Mensa)는 가장 크고 오래된 고지능자의 모임입니다. 멘사라는 이름은 둥근 탁자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비영리 단체로서, 비정치적이면서, 인종 및 종교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인구대비 상위 2%의 지능지수를 가지면 가입할 수 있습니다. 현재 회원이 약 11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모임이 멘사인데 아이큐 148이상입니다. 보통 사람의 아이큐, 한국인의 경우는 106-110 이라고 합니다. 또한 보통 사람의 50%는 두 자리수 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멘사에 속한 사람은 인류의 상위 2%로 소위 천재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이큐는 얼마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다고 하셨습니다. 굳이 표현 한다면 곧 ‘무한대’ 이십니다. 이제 계산해 보세요. 100이 겨우 넘는 세자리 수 아이큐를 갖고 사는 우리와 무한대의 전지함을 갖고 계신 하나님, 누구의 생각과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을까요? 이렇게 말해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아이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이어령 교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성을 넘어 또 다른 영성의 세계가 있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때로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믿음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 전혀 생각지 못한 결단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고 표현 하심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뛰어 넘는 초월적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왜 믿음이 필요한지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증거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수학이 다르다.
1절을 보세요.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룹바알(Jerub-Baal) “Let Baal Contend with Gideon” / “바알이 기드온과 맞서 싸우게 하자”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이유 중 하나는 바알을 쳐 부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의 집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는 바알과 아세라 곧 우상을 쳐 내시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6:25) 명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그대로 하였고 당시 미디안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깨뜨린 기드온을 죽이려고 할 때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이 스스로 기드온과 맞서게 하라고 만류하여 얻게 된 별명이 바로 여룹바알 입니다. 곧 사단이 맞서야 하는 용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룹바알은 단지 기드온 개인의 별명이 아닙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집 마다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시대 회복의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드온 개인적으로는 바알을 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이 맞서는 영적 전쟁으로 확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사단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정에까지 침투하여 들어옵니다.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를 섬기도록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의 바람과 비의 신이요, 풍요의 신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맘몬 곧 물질의 신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을 우상으로 섬겨며 사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여룹바알과 그를 따르는 백성과 미디안이 전장의 한 복판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적군은 수는 얼마입니까? 7:12절을 보세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사람은 ‘메뚜기의 많은 수’ 요, 낙타는 ‘해변의 모래같이 많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수십만명은 훨씬 넘는 수입니다. 이에 비해 기드온 곧 여룹바알과 함께 한 군사는 얼마입니까? 처음에는 3만 2천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7:2)고 하십니다. 적군은 몇입니까? 수십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2만 2천명이 돌아갔습니다. 만 명만 남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아직도 많으니”(7:4) 라고 하십니다. 적군은 수십만인데 만 명이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수를 정리하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을 마시는 태도에 따라 사람이 나누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에 대고 마신자 9천 7백명과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 마신 자 3백명 중에서 경계 태도가 좋은 3백명을 택하셨다고 봅니다. 그 해석도 맞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3백명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그들이 물을 그렇게 마셨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4절을 보세요.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르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르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된 3백명을 아셨고, 그들로 하여금 물을 그렇게 마시도록 역사 하셨음이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9천 7백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오직 3백명으로 이스라엘 을 구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처럼 3만 2천 명에서 300명으로 1/100로 줄이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수 십 만 대 3백명의 하나님의 수학의 답은 무엇입니까? 물론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그 답보다 더욱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긴 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 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이기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 해결하시는 수학의 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2절b를 보세요.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인간이 이렇게 연약해요. 조금만 수가 많으면, 무엇인가 이룬가 싶으면 ‘하나님을 거슬러 자랑하고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주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수학은 우리의 계산과 반대일 뿐만 아니라 그 답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우리가 우리 됨으로 자리매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승리와 겸손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공식입니까? 이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하나님과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다수가 아닌 소수로 일하신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사람이 많아야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 까? 그렇치 않습니다. 세상은 창조적 소수가 이끌어 나갑니다.
왜? 여리고, 아이성에서는 모든 자들이 군사로 싸우게 하셨는데 기드온 시대에는 300명으로 줄이 십니까? 여리고와 아이성 싸움은 가나안 땅 초기 정복 사건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처럼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교만하여 타락하는 역사를 반복하니 겸손함과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소수만으로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보이심으로 겸비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다수가 아닌 소수를 통해 하나님 살아계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수와 소수를 신약적 용어로 풀면 무리와 제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무리를 통해 일하지 않고, 제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3만 2천명이 300명으로 줄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지 않는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늘어나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대형화가 善이 되고, 대형화가 義가 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속적 가치가 교회마저 침범해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커져야 하고, 커져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떠합니까? 큰 만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비전은 작아지는 것인가요? 소수로 머물고 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영혼 전도해서 구원하고 진정한 제자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자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면 건강한 중소형 교회들로 분립해야 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만, 수천, 수백명에서 수백명이 좋습니다. 그 이상되면 교만해집니다. 섬기기도 어렵습니다. 스치는 목회를 하고 맙니다. 욕심 버리고 중소형 교회들이 알차게 세워져야 합니다.
최근에 개척한다니까 많은 분들이 기도와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 중 한 어르신 목양자의 조언이 마음에 녹아들었습니다. 소유론적 목회가 아닌 존재론적 목회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유론적 목회는 교회가 자꾸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더욱 커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홀로 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론적 목회는 그 교회가 존재하는 것 자체로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 지역에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목회입니다. ‘아! 우리 지역에 이런 교회가 있네!’ 하고 감동하게 하는 목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도가 위로 받으며 불신자에게까지 칭송받는 목회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그런 존재론적 교회였습니다. 이번에 보스턴에 가서 보스턴 마라톤 출발지에 세워진 보스턴 장로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교회 바로 앞에서 보스턴 마라톤이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 체육관은 매년 마라톤 선수들이 준비 운동을 하고, 출발하는 곳이 되었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 방에 와서 쉬었던 이봉주 그리고 다른 해의 케냐 선수가 우승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이 교회는 미국교회였는데 한인 교회가 샀다고 합니다. 100만불 준비했는데 처음에는 70만불, 그 다음에는 60만불 이면 됐다고 그렇게 팔았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교회에서 전덕영목사님이 29년간 목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교회가 커지는 것이 싫어 이제까지 7교회를 지역에 세웠다고 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참 귀한 분이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보기 드문 존경받는 목사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 세우는 것이 꿈입니다.
우리 LWC도 그렇게 갑시다! 작지만 강한 3백 용사와 같은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를 곳곳에 개척하여 드립시다! 우리 안에 이런 선한 소원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서 크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런 비전을 말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실천해야 할까요? 실제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지난 주 첫 예물부터 교회 차원의 십일조를 미래의 교회들 개척을 위한 Seed Money로 구별하여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 교회 헌금의 십분의 일을 다음 교회 개척을 위해 준비하기 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회 중 하나가 워싱톤에 있는 세이비어 처치입니다. 150명 정도 모이는데 1년 지역 선교, 구제비만 백만불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지역의 영혼들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이 작은 교회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라서 못한다는 것은 패배의식이요,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작지만 하나님께 붙들리어 쓰임 받으면 그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기드온이 참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3백명 남았는데 이제 가서 수십만을 물리치라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때 적군 가까이 내려갔을 때 하나님은 보초병들을 통해 꿈과 해몽을 하시므로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에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삿7:13)
3백명은 보리떡 한 덩어리에 불과해요. 어떻게 보리 떡 한덩어리가 굴러와 장막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그냥 보리떡 한 덩어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보리 떡 한 덩어리 라면 다릅니다.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의 순종과 헌신의 떡으로 오천명을 남긴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존귀히 하나님께 쓰임받는 말씀으로 사는 교회를 세우기를 소원합니다!
3.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
사실 다수가 아닌 소수로 역사하셨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사람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 홀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기드온과 3백 용사가 없어도 하나님이 미디안과 연합군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들과 같이 하십니까? 우리와 함께 사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동역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과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훈련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 가시는 거예요. 동역할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과 3백 용사가 한 것은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순종 뿐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은 믿음을 가져오고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100명씩 3대로 나누어 양손에 나팔과 횃불을 감춘 빈 항아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나팔을 불 때 세 대가 다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어 횃불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단지 나팔 불고 항아리를 깬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어떻게 수십만명을 이길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세요.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확신을 갖고 순종한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대한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하면 놀라운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다윗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3:21,22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폐하시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처음에 사울 왕이 얼마나 겸손했 습니까? 그러나 그가 왕의 권력에 도취되어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하나님도 그를 버렸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시145편) 이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이 왕인데 하나님을 왕으로 노래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은 자신의 자리에 서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된 후 그 위에 왕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을 버리면 확신할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기드온처럼,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와 영광입니다.
4.
이 시대의 기드온과 3백 용사로 쓰임 받으라!
기드온과 300명 용사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8장 4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마지막 시대에 LWC가 이런 용사들이 되길 원하실 것입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이 한 구절이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한 마디로 규모있고 성실한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기드온과 300백 용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아끼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수학을 믿은 자들입니다. 적군의 숫자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피곤의 본성을 이기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한 자들입니다.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이렇게 헌신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나요? 7장23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소수가 헌신하니 다수가 용사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갔던 자들이 용사가되어 다시 적을 추격하여 함께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형입니다. 12제자를 통해 70명을 깨우시고, 70명을 통해 120명을 깨우시고, 120명을 통해 500명을 깨우십니다. 지금 시대는 특히 그렇습니다. 지금은 개인 블로거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시대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사들이 절실합니다. 우리 LWC가 이 시대의 교회를 깨우고,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소수 첨병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에 사로잡힌 소수가 세상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중소형 교회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그렇게 가야 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기 바랍니다!
오직 그 말씀에 확신을 갖고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두려워 도망치지 말고, 무력한 다수 편에 서지 말고,
한 손으로는 말씀의 나팔을 불고,
한 손으로는 성령의 횃불을 듭시다!
항아리를 깨듯 우리 자신의 죄성과 교만을 깨십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선포합시다!
사탄이 맞서는 이 시대의 여룹바알이 되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승리의 용사들이 됩시다!
주여!
LWC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주의 용사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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