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고 있는 동계 올림픽에서 큰 이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러시아 이름은 <빅토르 안>, 안현수
선수입니다. 안 선수는 본래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였는데 러시아로 귀화를 하여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
3관왕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올림픽에서 통산 6개의 금메달과 2개의 동메달로 쇼트트랙 황제에 오른 선수입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까지 나서 안 선수가 왜 러시아로 귀화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돌아 볼 것을 권고했습니다. 알려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안 선수는 ‘쓰임 받고 싶어 러시아로 귀화한
것’입니다. 결국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서는 메달이 하나도
안나왔는데 안 선수는 금메달을 세 개씩이나 러시아에 안겼습니다. 아마도 운동에 대한 절실함이 더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빅토르 안>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어디서든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잘 쓰임을 받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면 사실 그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과 이 미국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사용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처럼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반면에 쓰임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의 모든 인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 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증거하기 원합니다.
1. 부르십니다.
8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사용하시기 전에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어,
자기 앞에 세우십니다. 이 부르심 곧 Calling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구원하심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점은 각 인생에 따라 다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구원과 사명입니다. 이 부르심을 통해 사람을 사용하시는 첫
출발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라고 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겠다는 것인데 곧 미래에 대해 알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지만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으로) 나아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에 대해 감격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보세요. 그런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이것이 이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한 첫번째 모습입니다.
그의 평생이 늘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처럼 온전한 순종과 감격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약속을 주십니다.
9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용하실 사람을 부르신 다음에 반드시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약속과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을 먼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 인간은 약속을
하고도 얼마나 쉽게 그 약속을 저버리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그리고 생명을 담보해서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식언을 많이 하므로 하나님의 약속도 그럴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약속 곧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다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바로 이 약속과 성취
사이에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고, 그 곳이 믿음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누가 받습니까? 아브라함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이 함께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나 자신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내, 나의 자녀, 나의 자손이 함께 받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약속을 나의 이웃, 나의 민족, 아니 모든 민족이 받아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만이 인간의 유일하고 영원한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인생의 작은 소원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온
우주적, 역사적,
영원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인생의 구체적인 삶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각 사람에게 다르게 오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동일한 약속인데 그 동일한 약속을 각 시대마다 각 사람마다 받는 것입니다. 9절 중반절에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각기 다른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동일한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도데체 약속이
무엇입니까? 약속은 곧 ‘유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업은 무엇입니까?
유업은(heirs: τῶν
συγκληρονόμων) 원뜻이 <공동 상속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공동 상속자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면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동일한
약속 곧 공동 상속자로 약속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부르신 자에게 주시는 약속은 보통 약속이 아니예요.
그 약속은 사실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참으로 감당 할 수 없는 영광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더불어 장막에 거했다” 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땅의 장막에서 더불어 거하면서 함께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약속, 사람의 약속이 아니라 우주의 왕이시요,
통치자인 왕의 공동 상속자로서 세우신다는 이 놀라운 약속을 받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3. 비전을 주십니다.
10절을
보세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부르신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바라보는 것”입니다. 곧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있는 사람은 살고, 비전이 없는 사람은 죽습니다. 비전은 꿈입니다.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답은 꿈이 사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꿈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비전이 이렇게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 비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 인생의 작은 꿈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꿈을 현실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지으실 성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그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 상속자로 삼아 주셨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감이 안나시지요? 빌게이츠가 여러분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다 상속하겠다고
하면 실감이 날까요? 이건희 씨가 여러분에게 삼성의 모든 것을 다 상속하겠다고 하면 실감이 날까요? 사실 그러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 상속자로 약속하셨다는 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작고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고, 약속을 받고, 비전을 받은 자가 얼마나 복 받은 자인지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현실적입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 결핍과 연약함이 많아 그저 현실
문제라도 제대로 해결 되었으면 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 문제도 외면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구체적 으로 계획하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방패되시고,
바로와 아비멜렉 가운데 아브라함이 실수로 위기에 처해도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현실의 문제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공동 상속자로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영원한 성을 계획하고 지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장막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동일한 약속을 받아 공동 상속자가 가족들, 성도들과
더불어 소망 가운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 가 있는 성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사용하십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비전을 주시며, 이제 비로소 사용하십니다. 12절
중반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 한 사람을
사용하심으로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노아 홍수 이후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의 대표로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용하실 때 아무때나 쓰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철저히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아브라함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준비되었습니까? 12절
상반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예전
한글 성경에는 “죽은 자와 방불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1절에도
보세요.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너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신체적, 의학적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니 의지적으로도,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절망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이지요.
‘죽은 자와 같은’ , ‘죽은 자와 방불한’ 그런 상태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쓰임 받기 위해 인간적, 세상적 기준으로 여러가지를 준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쓰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상태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얼마나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역사 가운데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준비와는 완전히 다른 준비를 시키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적 소망이 끊긴 상태, 나의 그 무엇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려놓는 순간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비로소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출발점입니다. 그전까지는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그런데 시간은 흐릅니다. 약속은 거짓
같습니다. 비전은 꺽여 절망의 상태에 놓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부도수표처럼 여겨지는 상황까지 몰고 가십니다. 진짜 그렇게 자기 사람을 다루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아무 소망이 없다고 탄식하며 자기 의와 자기 능력을 완전히 포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이제야 너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를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가 40세의 지식과 혈기가 왕성할 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애굽사람을 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학문을 통달하였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오히려 도망자가 되어 모든 인생의 꿈을 잃어버리고 80세의 미디안의 양치는 노 목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몇 번이나
확신을 주시고, 표적을 보여 주시며, 사람까지 붙여주시는데도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제야 모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도, 요셉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15세때 골리앗을 쳐 죽였을 때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거의 15년 30세가 될 동안 죽은 자가 되었을 때 사용하세요.
요셉도 17세에 비전을 주셨지만 30세까지
모든 수모를 다 겪은 후에 죽은 자처럼 되었을 때 사용하시 잖아요. 만약 그들이 혈기
왕성할 때 사용하시기 시작하셨다면 그들은 분명히 제대로 쓰임받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다 똑같음을 하나님이 너무 잘 아신 것입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내세울 것이 있으면 교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각자가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시점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것을 간파했어요.
내가 살아 교만해지면 하나님 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는
평상시에도 죽음의 영성, 죽은 자와 방불한 영성을 날마다 유지한 것입니다. 그의 자랑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유일하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은 자와 방불해
질 때가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임을 잊지말고 날마다 나를 죽이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1) 쓰임의 열매 – 어떻게 무엇을 위해 쓰십니까? 구원 백성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약속 밖에 있는 자들을 공동상속자로 초대하는 초대자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영광의 쓰임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을 목회했습니다. 이삭은 둘을 했습니다. 야곱은 12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하늘의 허다한 별와 해변의 무수한 모래가 된 것입니다.
(2) 쓰임의 자세 – 사모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16) 공동상속자로서 우리가 도착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주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3) 쓰임의 시한 – 쓰임에도 다 때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쓰임은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입니다. 그 때까지 잘 쓰임 받다, 잘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부르심, 약속, 비전,
쓰임에 대한 전체적 태도와 반응을 한마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믿음으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믿음이예요. 6절을 보세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부름받고, 약속을 받으며, 비전을 바라보며, 겸손히 쓰임받는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폭풍이라도 그것을 일으키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폭풍을 뚫고 올라가 그 윗 세상의 평온 가운데 달려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만을 믿고 순종하여 나아가는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LWC 말씀으로 사는 교회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굳건히 세워져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 존귀하고 겸손하게 쓰임 받다 하나님이 지으시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성 우리의 본향에 함께 안착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